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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 예상자

Yong-cheol Jeong

정용철

선교사 · B-8

정용철

온성군 탄광의 사로청 간부였다가 탈북해 회심하고, 흩어졌던 두 자녀를 다시 품고 시안 사역장을 이끌었다. 체포되어 북송되던 트럭 위에서 믿는 사람은 일어나라는 말에 가장 먼저 일어선 뒤 소식이 끊겼다.

지역
중국
순교 사유
북한 선교 사역 중 억류
기록 요약
온성군 사로청 간부 · 2001년 북송
소속/사역기수
중국 1차 사역 - 김권능 선생 팀 / 순교 예정자
주요 키워드
함경북도 온성군, 사로청 간부, 시안 사역장, 자녀 은희·봉철, 도문 변방 구류소, 북송, 순교의 길

2기 · 사역 기록

순교의 발자취

북송 트럭 위, 보위부원 앞에서 고백한 진짜 믿음

함경북도 온성군 출신, 사로청 간부였던 사람

정용철 선생은 함경북도 온성군 사람이다. 북한 함경북도 온성군 탄광에서 사로청 간부로 활동하다가 1997년 8월 26일 양식을 구하러 중국으로 탈북했다. 사로청은 ‘조선사회주의노동청년동맹’의 약자로, 북한의 전 국가적 청년 조직이었다. 정용철 선생은 이 조직의 간부로 활동했기에 북한의 사상과 이념을 많이 공부했고, 다른 어떤 이들보다 굳게 믿으며 체제에 충성하면서 살았다. 집에 모셔 놓은 김일성과 김정일의 초상화를 자주 닦고 관리하며 자녀들에게 수령님의 은혜를 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하던 사람이었다.

식량난 속에서 무너진 충성과 가족의 흩어짐

1990년대 말 북한은 무서운 식량난을 겪었고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다. 정용철 선생의 가정에도 양식이 떨어졌다. 아내와 어린 아들딸, 네 식구가 들판의 잡풀로 끼니를 연명하다 탈진했다. 정용철 선생은 막대기 하나에 몸을 지탱한 채 양식을 구하러 나갔다가 피투성이가 되어 안전원들에게 끌려왔다. 안전원들은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그를 구타했고, 집 안에 있던 통기타, 피리, 하모니카 등 소중한 물건들을 몽땅 가져갔다. 음악과 시를 사랑하던 그에게 그것들은 굶어 죽어도 포기하고 싶지 않던 보물이었다. 그날 그는 북한 체제를 향해 품어 왔던 확신과 충성이 무너지는 경험을 했다. 결국 가족은 양식을 찾아 흩어졌고, 아내와 아이들까지 각자의 길로 떠나게 되었다.

거짓에 속았다는 허탈감과 신앙에 대한 반발

중국 친척의 도움으로 정용철 선생은 아이들을 중국에서 다시 만났지만 함께 살 수는 없었다. 아무런 생활 기반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넓은 중국 대륙에서 다시 아이들과 헤어졌고, 갈 곳이 없어 김권능 선생과 함께 산시성 시안시 사역장으로 공부하러 왔다. 탈북 후 자신이 얼마나 큰 거짓에 속아 살아왔는지를 알게 되자 극심한 허탈과 공허에 빠졌다. 그 후부터 아무것도 믿으려 하지 않았고 신앙에도 심하게 반발했다. 그는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에 ‘그런 게 어디 있느냐’고 했고, 통독 시간에도 중국어 공부를 하겠다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조금씩 변화되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었다. 완강하던 정용철 선생도 시간이 지나면서 말씀을 계속 듣게 되었고, 예배 때마다 김권능 선생이 풀어 주는 성경 말씀과 기도 생활 속에서 변화되어 갔다. 처음에는 예배에도 관심이 없고 기도 시간에도 마지못해 참석하던 그가 어느 때부터는 찬송가를 즐겨 부르기 시작했다. 특히 ‘이전에 주님을 내가 몰라’라는 찬송을 즐겨 불렀고, 때로는 그 가사를 평양 방송 아나운서처럼 시 낭독하듯 부르기도 했다. 그 찬송가의 가사 속에 자기 마음이 잘 표현되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회심과 세례, 남은 여생을 복음의 사명자로

은혜를 받으면 사람이 겸손해진다. 정용철 선생은 은혜를 받은 뒤부터 자기보다 훨씬 어린 김권능 선생을 정중하게 대했고 말없이 그의 지시에 순종했다. 어느 날 그는 회심을 결단하고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리고 이 신앙 안에서 죽고 살겠다고 고백했다. 이후 김의환 총장님께 세례를 받았고, 그는 ‘망망한 대해에 떠다니는 파산 직전의 표류하는 운명의 쪽배에 실린 나를 불러 주시고 영생을 주신 하나님께 이제 남은 여생을 복음의 사명자로 죽도록 충성하겠다’고 고백했다.

아이들을 향한 아픈 한과 다시 만날 것이라는 예언

함께 살고 싶었지만 두 번씩이나 헤어져야 했던 아이들 때문에 정용철 선생은 기도 시간에 늘 울었다. 자기보다 어린 사람들 앞이라 소리 내지 못하고 눈물만 뚝뚝 떨구며 기도했다. 이것을 최순교 선생이 자주 보았다. 가족에 대한 아픈 사연이 있던 최순교 선생은 그의 고통을 함께 느꼈다. 어느 날 깊이 기도하던 최순교 선생은 정용철 선생에게 ‘아이들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아이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정용철 선생은 장난으로 여겨 크게 화를 냈지만, 그 말은 훗날 그대로 이루어졌다.

기적처럼 다시 만난 아들 봉철

정용철 선생은 김권능 선생 사역 팀에 1년간 속해 있으면서 신약 성경 100독 이상, 구약 성경 10독 이상을 읽었고 성경 말씀도 500절 이상 암송했다. 북한 선교사 훈련을 마친 뒤 김권능 선생 팀과 함께 옌볜으로 파송되었다. 그는 학생 모집을 위해 이곳저곳을 다니다가 기적을 만났다. 중국식 오토바이 택시인 싼룬처를 타고 시골길을 달리던 중, 앞에서 어른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작은 남자아이를 보았다. 이상한 예감에 뒤돌아본 그는 그 아이가 매일 눈물로 기도하던 아들 봉철임을 알아보았다. 그는 싼룬처에서 뛰어내려 아들을 안고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아들은 두 번이나 북송을 당한 뒤 다시 중국으로 넘어온 상태였고, 몸은 말이 아니었다.

아이들을 품고 시작한 산시성 시안 사역장

정용철 선생은 아들을 그냥 두고 갈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대로 두면 또 잡히고 결국 죽을 것이며, 간신히 살아남는다 해도 배워야 할 나이에 배우지 못해 평생 눈뜬 장님처럼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아들을 데리고 가기로 했다. 이후 인민군 상사 출신 김예진 형제, 중국인 아내와 결혼 생활을 하고 있던 김태진 형제, 윤병조, 이철민, 게바, 동철, 김훈, 요한 형제들을 데리고 시안으로 내려왔다. 딸 은희와 아들 봉철이도 함께 데리고 왔다. 정용철 선생은 시안 북쪽 지역에 집을 임대하고 사역을 시작했다. 나는 남자들만 살고 있는 사역장에 아이들이 지내기 어렵다고 판단해 정용철 선생의 두 아이들을 우리 집으로 데려와 우리 아이들과 함께 먹이고 공부시키고 학교에도 보냈다.

소록도 북성교회에 보낸 감사 편지

북한 사람들은 대체로 과묵하고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으며 칭찬도 잘 하지 못한다. 정용철 선생도 내가 그의 두 자녀를 키워 주고 공부까지 시키는 것을 늘 고맙게 여겼지만, 내게는 별로 표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소록도 북성교회 성도님들에게 편지를 보내 자기의 고마운 마음을 표현했다. 편지에서 그는 자신과 아이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속에서 말씀을 배우고 있음을 전했고, 남의 나라 이역 땅에서 자기 자식들 못지않게 돌봐 주는 사랑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고백했다.

말 안 듣는 학생들과 사역자의 고통

정용철 선생은 북한 형제들을 훈련시키느라 고생을 많이 했다. 처음 사역장에 들어오는 북한 형제들은 정말 말을 듣지 않았다. 지도자의 말에는 앞에서만 듣는 척하고 뒤에서는 딴짓을 하며 살아온 습관 때문인지 계속 엇나가고 말썽을 부렸다. 학생들은 정용철 선생 몰래 사역장 주변 소매점에 가서 담배와 술을 외상으로 사 마셨고, 그 돈을 정용철 선생 이름으로 달아 놓기도 했다. 또 어떤 형제는 훈련 강도를 견디지 못하고 떠나면서 사역장에 있던 Q&A 주석 한 세트를 몽땅 훔쳐 갔다. 정용철 선생은 분노했지만, 나는 성경을 배우겠다고 그 책을 가져간 것이니 그냥 두자고 말렸다. 그는 학생들이 속을 썩일 때 힘들어했지만, 자기 학생들을 참 많이 사랑했다.

병조 형제를 자랑하던 사역자

정용철 선생은 학생 때보다 몸이 반으로 줄어들 만큼 힘들었지만, 자기 학생들을 사랑했다. 나를 만나면 늘 자기 학생들 자랑을 했다. 특히 병조 형제를 많이 자랑했다. 병조 형제가 성실하고 말씀 암송도 1000절 이상 했으며 앞으로 참 기대되는 형제라고 말했다. 그의 헌신적인 수고와 노력으로 그가 가르친 학생들도 모두 예수님을 영접했고 북한 선교사로 세워졌다.

화산에서의 기도와 선교사로 세워진 형제들

정용철 선생 사역장의 형제들과 강규총, 김순종 선생 사역장 형제들은 북한 선교사로 세워진 것을 기념하기 위해 산시성 시안시 인근의 화산에 올라갔다. 그날 화산 정상에서 기도 모임을 가졌고, 북한 선생들은 북한을 복음화하는 일에 자신을 바치겠다고 서원했다. 정용철 선생도 ‘이전에 주님을 내가 몰라’라는 찬송을 부르며 각오를 다졌다. 이 사진들은 훗날 북한 선교 역사에서 귀한 자료가 되었다.

확장된 시안 사역과 마지막 식사

시안에서 사역은 많이 확장되어 인원이 90명 이상으로 늘었다. 3기 사역장과 4기 사역장이 함께 섞여 있었기에 혼란스럽기도 했고, 오랫동안 시안에서만 사역했기에 다른 도시로 이사 갈 필요도 있었다. 사역 팀장들이 한자리에 모여 이사 문제를 의논했고, 오랜만에 회포를 풀고 고생한 북한 선생들을 대접하기 위해 호텔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그때 3기 사역장 선생들은 강규총, 정용철, 김순종 선생이었고, 4기 사역장 선생들은 신소망, 신재복, 이욱, 이선장, 신용재, 김기철, 조복화, 그리고 조선족 김광철 선생이었다.

‘이제 죽어도 원이 없다’는 고백

나는 700위안짜리 식사를 주문했다. 당시 돈으로는 큰돈이었지만 북한 선생들은 입이 벌어졌다. 정용철 선생은 ‘선교사님, 이런 데는 처음 와 봅니다. 너무 화려해서 몸이 다 오스스 떨립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하나님 말씀을 통해 구원받고 두 아이가 이곳에서 학교 공부를 하고 이렇게 호화로운 식당에서 밥을 먹으니 말입니다. 이제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했다. 그 고백은 진심이었다. 이날 정용철 선생은 우리와 함께 중국 공안에 체포되었다. 그때부터 그는 그 고백대로 죽음을 향해 묵묵히 말없이 걸어갔다.

서안시 공안국 체포와 도문 변방 구류소

우리를 체포한 시안시 공안국은 64명의 북한 형제들과 10여 명의 중국 형제들을 중국과 북한 국경 도시인 도문시 변방 구류소로 호송했다. 그곳은 중국에 체류 중인 탈북자를 가둔 뒤 북한으로 송환하는 곳이었다. 나와 북한 선생들의 체포로 사역장이 해산되자 은희와 봉철이는 옌볜으로 돌아갔다. 가는 길에 두 아이는 염차 안에서 무장 군인들에게 호송되는 아버지를 보았다. 그것이 어린 두 아이들이 마지막으로 본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도문 구류소에서 붙잡은 마지막 희망

도문 변방 구류소에 도착하자 북한 형제들은 5개의 감방에 수감되었다. 곧 조사가 시작되었고, 북한 형제들 속에 섞여 있던 중국 조선족들은 분리되어 간단한 훈계만 받고 석방되었다. 사역장의 일정대로 아침에 일어나 기도 모임과 예배를 드릴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예배드리고 기도했다. 감방 안에 있던 1기생 진칼빈, 박요한 선생이 잠혀 나가며 쓴 글귀가 있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정용철 선생과 박요한 선생은 그 글을 보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이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겠습니다’라고 고백했다.

북송과 사라진 희망

도문시 변방 구류소는 북한 형제들을 오래 붙잡아 두지 않았다. 섞여 있던 중국인 조선족 형제들만 골라내고 일주일 뒤 59명의 탈북자들을 곧바로 북한으로 강제 북송했다. 중국 군인들이 그들을 트럭에 싣고 떠나는 순간, 모든 북한 형제들은 희망을 잃었다. ‘이제는 다 죽는다.’ 구류소 안의 공기는 무거워졌고, 그들의 마음속에서 숨 쉴 수 있었던 작은 희망도 사라졌다.

트럭 위에서 선포된 순교의 길

북한에는 낡은 트럭 한 대가 마중 나왔다. 보위부는 자동자용 기름이 없어 보통은 탈북자들을 도보로 이동시키지만, 시안에서 체포된 이들은 특별히 취급해 트럭으로 남양시를 지나 온성군 보위부로 호송했다. 보위부 간부는 트럭에 탄 이들을 향해 ‘이제 그 하나님의 전사들이야?’라고 비웃었다. 술렁임이 지나간 뒤 보위부 간부가 ‘야, 여기서 하나님 믿는 사람 일어나라!’고 말했다. 순교의 순간이었다. 정용철 선생이 먼저 일어났고, 이어 신용재, 이선장, 조복화, 강규총 선생이 일어났다. 다시 누군가가 일어났고, 결국 모두 일곱 명의 선생과 형제들이 일어났다.

‘여기는 죽음이 축복이 되는 곳입니다’

그 후 우리는 끌려간 일곱 명의 소식을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 북한 체제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그들의 앞날을 상상하기 싫어했다. ‘저들을 죽이나요?’라는 질문에 내가 물으니 한 북한 형제는 ‘거기는 죽음이 축복이 되는 곳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아무도 더 대답하지 않았다. 언젠가 북한이 열리는 날, 우리는 그들의 아름다운 순교의 현장을 찾아가게 될 것이다.

아이들에게 이어진 순교의 씨앗

정용철 선생의 아이들인 은희와 봉철이는 훗날 한국으로 왔다. 아버지는 주님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걸어갔고, 두 자녀는 그의 뒤를 받아 주셨다. 처음 정용철 선생이 두 아이를 데리고 왔을 때는 작고 귀여운 아이들이었지만, 이제는 멋진 청년들로 성장했다. 2012년에 들어서며 하나님은 한국에서 북한 선교의 장을 펼치라는 음성을 주셨고, 나는 한국에서 사역을 다시 시작했다. 탈북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회를 개척하려고 하던 때, 봉철이가 나를 찾아와 함께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현재 정봉철 형제는 황금종교회의 학생회 회장을 하고 있다. 아버지는 순교의 피로 북한 선교의 길을 열었고, 아들은 아버지가 열어 놓은 그 길 위에서 하나님의 큰 일꾼이 되어 가고 있다.

육성 그대로

남긴 글 · 마지막 편지

정근두 목사님께 드린 회심 고백 편지

존경하는 정근두 목사님께 드립니다.

안녕하십니까? 멀고도 가까운, 가까우면서 멀고 먼 남녘, 한 나라 한 지맥으로 잇닿은 한라산과 제주도….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품속에서 한 형제로 남녘에 계시는 명성 높으신 정근두 목사님께 서신을 드리게 됨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북녘의 동포들을 대신하여 타향의 이국만리에서 머리 숙여 인사를 드립니다.

저는 북한에서 탄광 노동자로 일하다 1997년 8월 26일 중국을 넘어온 탈북자 정용철입니다. 어쩐지 같은 성씨를 가진 목사님께 글을 쓰는 마음은 친아버지나 친삼촌에게 쓰는 듯한 기쁜 심정입니다. 여기 중국 땅에서 최광 선생님을 통하여 예수님을 영접하고 김의환 목사님께서 세례하여 주시고 주님 안에서 새 생명을 찾았습니다. 그날 찬송 186장을 부르면서 주님의 보혈로 저의 죄를 정결케 하여 주신 그 은혜와 사랑이 너무나 고마워 두 볼로 흐르는 눈물을 걷잡을 수 없었습니다.

가을바람에 흩날리는 가랑잎과 같은 신세를 면치 못했던 저를, 망망한 대해에 떠다니는 파산 직전의 표류하는 운명의 쪽배에 실린 저를 불러 주시고 영생을 주신 하나님께 이제 남은 여생을 복음의 사명자로 죽도록 충성하리라고 굳은 마음을 다졌습니다.

정근두 목사님, 오늘 저희 사역을 이끌고 나가시는 최광 선생님께서 한국으로 가십니다. 3기 사역을 위하여 사역비를 해결하기 위해 떠나는 걸음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한국 교회를 통하여 중국에서의 북한 탈북자들을 위한 사역장의 확장이 반드시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 저는 굳게 확신하며 목사님께서도 저희 사역장과 함께 동역하시리라 믿습니다.

저희들의 2기 사역은 8월 27일부터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9달이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신약 9독, 구약 10독, 암송 150절을 이루었고, 봄날의 새싹과 같이 날마다 자라나는 저희들의 사역장과 함께 동참하시는 한국의 선량한 목사님과 같은 분들이 있으므로 사역비 문제는 반드시 해결되리라 믿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복음의 통일은 이루어지리라 믿으며 귀하신 목사님의 건강과 사모님과 교회의 여러 성도들 모두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축복이 있으리라 믿으며 안녕히 계십시오.

2000년 4월 15일

정용철 드림

소록도 북성교회 남효선 장로님께 드린 편지

소록도 북성교회 남효선 장로님께 드립니다.

장로님 안녕하십니까?

이 시간도 저희들 사역장을 위하여 열심히 기도하시고 계실 장로님과 권사님들, 성도님들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하오며 뒤늦게나마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저는 1997년도에 나서 자란 고향 산천을 등지고 살 길을 찾아 눈물의 강 두만강을 넘어 저희 집 식구, 딸과 아들과 함께 중국에 넘어와 길가의 조약돌처럼 이리저리 헤매다가 라 선생님을 통하여 사역장에 와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오늘날까지 1년 2개월 말씀을 학습하고 있습니다. 저희 딸 14살, 아들 11살 오누이는 지금 라 선생님의 집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속에서 부러운 것 없이 성경 말씀을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북한에서야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먹을 것이 없어서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생리별의 아픔과 고통의 비극, 북한의 현실 속에서 남의 집 자식 둘씩이나 키워 준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 못합니다. 하나님이 키워 주신 참된 그리스도인들만이 할 수 있으며, 자기 집 식구들만도 일곱 명을 거느리기 바쁜 남의 나라 이역 땅에서 제 자식들 못지않게 돌봐 주시고 병 날세라 보살펴 주시는 하나님의 그 사랑이 너무나 고맙고 감사할 뿐입니다.

저희 사역장의 형제들은 모두 매일 아침 1시간 기도와 8시간의 통독, 저녁 시간에도 기도를 마치고 말씀 암송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앞선 형제들은 500절이나 암송하고 통독은 5월 1일부터 현재까지 하고 있습니다. 저녁과 아침에는 우리 사역장 모두가 무릎 꿇고 하나님 아버지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첫 사역부터 사역장을 위하여 기도의 열기가 폭포처럼 쏟아져 하나님께 기도를 하여 준 소록도 북성교회 장로님들과 권사님, 성도님들의 귀한 건강을 지켜 주시고 남북의 복음 통일을 볼 수 있도록 하여 달라’고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고마운 소록도 북성교회의 수많은 교회 성도님들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심으로 수많은 사역장들이 생겨나고, 앞으로 확산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심에 따라 창대해질 것을 확신을 가지고 라 선생님은 저희들을 이끌어 나가고 계십니다.

사역장을 위하여 언제나 기도하여 주시기를 부탁드리오며 남북의 통일된 내 나라 강토에서 다시 만나기를 바라며 안녕히 계십시오.

2000년 10월 1일

정용철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