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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Man-sik Jang

故 장만식

아비아 · B-4

장만식

명천 탄광의 당 비서였다가 탈북 후 예수를 만나 사역장의 최고령 어른이 되었다. 공안에 붙잡힌 밤 스스로 미끼가 되어 형제들을 담 너머로 도피시키고, 북송된 뒤 온성군 보위부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지역
중국
순교 사유
북한 선교 사역 중 순교
기록 요약
2기 명천 탄광 세포비서 · 온성군 보위부 사망
소속 / 사역기수
중국 1차 사역 (2기) / 권능 선생 팀 · 3기 사역
주요 역할
탈북 형제 보호, 학생 모집과 인도, 사역장의 어른 역할
주요 지역
함경북도 화대군 명천, 옌볜 조선족 자치주 숲속 마을, 산시성 시안시, 쓰촨성 청두시
결말 / 기억
원문 기준: 북송 후 온성군 보위부에서 병으로 순교한 것으로 회고됨

2기 · 사역 기록

순교의 발자취

예순에 배운 성경 말씀을 죽기 전 실천한 아바이

명천 탄광의 당 비서, 장만식 아바이

장만식 아바이는 함경북도 화대군 명천 탄광연합기업소에서 세포비서를 하던 사람이었다. 한국의 한 개 면장 정도의 직책을 가지고 살았고, 꽤 높은 지위와 안정적인 생활을 누렸다.

우리는 그를 장 아바이라고 불렀다. 이 이름은 우리에게 자기 이름을 장만식이라고 소개했기 때문에 붙인 호칭이었다. 본명인지는 알 수 없지만, 청년들로 모여 살던 사역장 안에서 그는 유일한 노인이었다.

장 아바이는 당 비서로 있으면서 북한 김정일 체제의 문제점을 다른 사람들보다 깊이 체험하게 되었다. 북한 정권의 악한 정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다른 두려움 때문에 쉽게 자기 생각을 말하지 못하고 살았다.

고발과 탈북, 그리고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갈 위기

장 아바이는 솔직한 자리에서 친구에게 자기의 불편한 심기를 털어놓았다. 그러나 그 친구는 장 아바이를 배신했고, 그의 말은 보위부에 전해졌다. 결국 장 아바이는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게 되었다.

생활이 어려워지자 장 아바이는 중국으로 탈북했다. 내몽골 지역에서 한동안 숨어 살던 그는 공안에 체포되어 북한 온성군 보위부로 끌려가 감옥에 갇혔다. 그곳에서 한 사람이 빵과 햄을 주며 접근했고, 작은 인정에 감격한 장 아바이는 중국에서 들은 남한 이야기를 그에게 들려주었다. 마지막에는 이렇게 말했다.

“이 나라는 김정일이가 있는 한 안 돼”

장 아바이는 중국에서 들은 남한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주었고, 마지막에 “이 나라는 김정일이가 있는 한 안 돼”라고 말했다. 이 말은 그대로 보위부에 전해졌다. 그 사람은 보위부가 장만식 아바이를 잡기 위해 심어 놓은 요원이었다. 결국 장 아바이는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 뒤 장 아바이는 병원에서 기풍 선생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기풍 선생을 통해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그의 인생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보위부 병원에서 만난 기풍 선생

보위부에서는 장 아바이에게 먹을 것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 장 아바이는 민족 반역자이며 김정일 장군을 모독한 자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감옥 안에서 심각한 영양실조에 걸렸고, 장 아바이는 병원으로 옮겨졌다.

보위부 요원들의 감시를 받으며 병원에 입원한 장 아바이는 화장실을 오가기도 힘들 만큼 약해져 있었다. 그때 가까운 마을에서 탈북자들과 함께 머슴살이를 하던 유기풍 선생이 나타났다. 기풍 선생은 장 아바이를 북한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

기풍 선생은 병든 장 아바이를 극진히 간호했다. 먹을 것을 챙겨 주고, 일하는 탈북자들의 밥을 해주면서 장 아바이를 돌보았다. 그 후 기풍 선생은 우리 사역장에 들어와 공부했고, 장 아바이도 점차 회복되어 기풍 선생을 따라오게 되었다.

숲속 마을에서 만난 달라진 기풍 선생

탈북자들이 숨어 살던 숲속 마을에 권능 선생과 기풍 선생이 나타났을 때, 장 아바이는 북한에서부터 기풍 선생을 알고 지냈다. 그러나 눈앞에 나타난 기풍 선생은 예전의 그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매우 정중했고, 예전과 다르게 매일 진지하게 기도하며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가르치고 있었다.

장 아바이는 일생을 살면서 사람이 이렇게 극적으로 바뀌는 경우를 처음 보았다. 그는 기풍 선생에게 정식으로 요청했다.

“나도 사역장에 학습하러 가면 안 될까?”

장 아바이는 기풍 선생에게 말했다.

“나도 사역장에 학습하러 가면 안 될까? 기풍 선생님.”

기풍 선생은 장 아바이가 60세가 다 된 노인이어서 만류했다. 젊은 사람들도 견디기 힘든 사역장의 훈련을 노인이 버틸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 아바이는 기풍 선생의 다리를 붙들며 매달렸다.

꼭 자기를 데려가야 한다고 했다. 장 아바이는 기풍 선생의 팀에 합류하여 중국어와 성경을 배우기 시작했다.

토요일마다 근처 운동장에서 운동을 하거나 산책을 하곤 했다. 가운데 장만식 선생의 모습이 보인다

학생들을 데리고 시안으로 내려오다

학생 모집을 위해 옌볜으로 파송되자 장 아바이는 권능 선생 아버님이 살고 있는 숲속 마을로 갔다. 그곳에는 이미 김 아바이가 모집해 놓은 많은 북한 형제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덕분에 장 아바이는 비교적 쉽게 학생들을 모집할 수 있었다.

장 아바이는 모집한 학생들을 데리고 시안으로 내려왔다. 새벽에 내가 역전으로 마중 나갔을 때, 장 아바이는 학생들을 인도하여 역에서 막 나오고 있었다. 그는 두 손으로 내 손을 꼭 잡고 반갑게 인사했다.

장 아바이는 학생들을 이끌고 온 사실에 매우 흥분해 있었다. 공안의 단속을 무사히 피해 학생들을 인도해 온 것이 그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로 보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정말 자기들을 보호하셨다고 고백했다.

권능 선생 팀과 3기 사역

연세 많은 장 아바이는 멀리까지 걸어 다니기 힘들었기 때문에 시안 역 주변에 집을 임대해 사역장을 꾸렸다. 그가 데려온 형제들은 유대훈, 정필민, 최도아 등 모두 7명이었다. 처음 사역장에 들어오는 북한 형제들이 대부분 그렇듯, 그들도 몹시 흥분해 있었다.

그러나 장 아바이는 힘들다는 표현을 잘 하지 않고 묵묵히 참으며 학생들이 변화되기를 기다려 주었다. 장 아바이의 사역장은 권능 선생이 직접 관리했다. 이 일로 나는 장 아바이의 사역장을 네 번 정도밖에 가보지 못했지만, 그는 기억 속에서 가장 성실하고 열심히 사역했던 분으로 남아 있다.

김의환 총장님 방문과 사역장의 기쁨

김의환 총장님이 시안에 있는 우리 사역장에 오셨을 때, 사역장에 있던 모든 북한 형제들이 호텔로 초대되어 한 끼 식사를 대접받았다. 그때 권능 선생 팀 형제들은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총장님은 새롭게 북한 선교사로 세워진 이들을 격려했고, 이후 청성산 유람도 함께했다. 북한 형제들은 도교가 무엇인지, 노자가 누구인지 잘 몰랐지만, 한국에서 온 대학생들과 함께 여행하며 신기해하고 즐거워했다.

장만식 아바이는 많은 것을 진지하게 들여다보았다. 공부를 한 분이라 그런지 모든 것을 어린이처럼 단순히 즐기는 데서 그치지 않고, 많은 것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장만식 선생과 김의환 총장

세례와 성찬, 그리고 아버지 같은 역할

주님을 만난 후부터 장 아바이는 늘 울기만 했다. 고맙다고, 주님이 너무 감사하다고 했다. 그는 죽어도 더 이상 원이 없다고 말했다. 장 아바이는 정말 마음이 넉넉한 할아버지였다.

북한 형제들이 사역장 안에서 서로 다투고 싸우다가도 장 아바이가 몇 마디 꾸짖으면 금방 화해하고 그에게 순종했다. 그는 사역장에서 아버지 같은 역할을 했다. 그래서 형제들은 그를 “선생님”보다 “장 아바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자연스러웠다.

김의환 총장님이 오셨을 때 장 아바이는 세례를 받았고, 성찬식에도 참여했다. 그 장면은 훗날 귀한 역사 자료가 되었다.

권능 선생에게 철저히 순종한 노년의 제자

기풍 선생 팀이 한국으로 데려간다고 베트남으로 간 뒤 팀이 해산되자, 다른 형제들은 제 갈 길로 갔다. 그러나 장 아바이는 권능 선생 팀으로 갔다. 권능 선생은 그의 아들보다도 5세나 어렸고, 나이 차이는 24살이었다.

그럼에도 장 아바이는 권능 선생에게 전적으로 순종했다. 권능 선생이 지적하면 10원짜리까지 따지며 계산이 맞지 않았던 습관도 고치려고 애썼다. 주님은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주신다는 것을 장 아바이의 삶을 통해 보았다.

체포와 탈출의 밤

장만식 아바이 사역장 전원이 공안에 체포되었다. 이웃 주민의 신고를 받고 공안이 달려왔고, 공안들은 신분증도 없고 중국말도 하지 못하는 형제들을 수상히 여겨 전원을 공안국으로 연행해 갔다.

공안들은 이들이 한국 선교사를 만났고 성경 공부를 했다는 사실을 확인하려 했다. 장 아바이는 책임자라는 이유로 심한 심문을 받았다. 60이 다 된 노인이 감당하기 힘든 고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모질게 맞으면서도 나에 대해서도, 우리 사역장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저녁이 되자 공안들은 장 아바이와 북한 형제들을 공안국 담장 앞에 세워 놓고, 공안 두 명을 보초로 세웠다. 그때 장 아바이는 형제들에게 조용히 말했다.

“내가 저쪽 담장 쪽으로 도망치면서 이 공안 애들을 유인할 테니, 니들은 그 사이에 저쪽 낮은 담장 쪽으로 도망가라. 들었지?”

잠시 후 장 아바이는 낮은 담장과 반대 방향의 높은 담장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보초들은 장 아바이를 향해 달려갔다. 그 사이 북한 형제들은 낮은 담장을 넘어 도망칠 수 있었다.

북송과 순교

마지막으로 담장을 넘은 학생이 본 것은 두 공안이 장 아바이를 붙잡고 몽둥이로 사정없이 내려치는 모습이었다. 그 소식을 들은 우리는 울었다. 장 아바이는 끌려갔고, 결국 북한으로 송환되었다.

온성군 보위부에서 장 아바이는 병에 걸렸다. 연로한 노인이 혹독한 감옥의 상황을 견디기 어려웠고, 병까지 나자 결국 감옥 안에서 쓰러졌다. 그는 온성군 보위부에서 숨을 거두었다.

장 아바이의 도움으로 담장을 넘어 도망쳤던 북한 형제들은 한 사람을 남기고 모두 추격에서 벗어났다. 붙잡힌 형제도 일반 탈북자로 분류되어 무사히 나올 수 있었다. 그 형제가 권능 선생을 찾아와 장 아바이의 마지막을 전해 주었다.

장만식 아바이가 남긴 믿음의 길

장만식 아바이는 인생의 마지막 골머리에서 예수님을 만나 자기 목숨을 던져 형제들을 살려냈다. 순교자의 반열에까지 올랐다.

그는 아름다운 삶을 보이고 떠난 믿음의 사람이다. 북한 땅에 복음이 전해지는 날, 많은 북한 사람들이 장만식 아바이의 순교를 알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기록을 남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의 숭고한 희생을 통해 복음이 그들을 향해 다가갔는지를 알게 되기를 바란다.

육성 그대로

남긴 글 · 마지막 편지

존경하는 권사님 전

존경하는 권사님 전

권사님, 저는 기도 시간마다 권사님을 생각해 보지 않은 날이 하루도 없습니다. 그것은 거짓이 아닙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먼저 하나님과 저와 가까워지도록 인도하여 주신 최 선생님 때문입니다. 최 선생님이 아니라면 제가 하나님을 알 수 없었을 것이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할지라도 약 5년~10년 후에나 주시겠는지 그것은 하나님이 아십니다.

다음은 권사님은 나이가 많으셨지만 아직도 주님의 일을 젊은 기백으로 해 가고 계시고 또 훌륭한 아드님과 며느리를 두셨는데 나는 왜 오늘까지 허무한 삶을 살았고 또 나의 자식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 것입니까? 생각할수록 분하고 원망스러운 것이 있어 - 북한 땅.

권사님 늦게나마 주님을 알고 예수님 믿게 됨이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권사님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나로 하여금 나의 구주 예수를 끝날까지 의심치 않고 주님을 향한 저의 믿음이 나의 생활을 방해하는 세상 것의 모든 어떠한 것도 버리도록 기도를 해 주십시오. 또 나의 기도가 나에게 있어서 온전한 신앙 고백이 되도록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권사님, 제가 주님의 일을 온전하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권사님은 저의 선생님뿐더러 선배입니다. 선배는 후배를 도와줄 의무가 있습니다. 또 후배는 선배의 모범을 본받을 의무가 있고요.

저의 오늘날 하루하루는 천국에 사는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은혜롭고 감사하며 기쁘기만 합니다. 제가 책임진 사역장이 좀 부족한 점은 있지만 능히 극복할 수 있는 문제이며 주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변화되어 감이 느껴집니다. 주님 앞에 얼마나 감사한지.

권사님, 권사님께서 사모님과 더불어 최 선생님이 주님의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안받침해 주시기 때문에 이 사역이 번영 창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권사님 그리고 사모님께 드린 편지

권사님 그리고 사모님 정말 감사합니다.

의인 열 명만 있으면 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의인이 되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내가 죄인이고 그것이 깨끗이 씻어져 흰 눈같이 되려면 부단한 회개와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로 하지 않습니까?

성령님께서는 왜 저를 더디게 변화시켜 주시는지? 내게 아직도 교만이 있는가 봐요.

하루라도 빨리 변화되어 권사님과 사모님 그리고 최 선생님의 수고를 덜어 드려야겠는데 참 마음뿐입니다. 저를 용서하십시오.

제가 월남(베트남) 갔다 왔을 때에도 용서하여 주시었는데 앞으로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실 줄 믿습니다. 한 번 빠진 웅덩이에 다시 빠진다면 온전치 못한 짐승과 다름이 무엇이겠습니까? 다시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권사님, 권사님을 본지도 오래여서 보고 싶기도 합니다. 권사님 건강에 힘쓰십시오. 권사님은 여기 매 사역장의 어머니이시기도 합니다. 우리는 매일 권사님과 사모님을 위하여 기도 제목이 있음을 아십시오.

소전은 기쁨이며 감사이겠지만 세상에 있는 동안 주님의 일을 많이 하는 것이 큰 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권사님 건강이 우리의 보다 큰 힘이 되심을 아셔야 합니다.

모국을 떠나 나그네 길 위에 있으나 성령 충만하신 권사님과 사모님을 생각하면 저에게 더 없이 큰 위로와 힘이 되십니다. 늙으면 말이 많다더니 저의 편지가 지나치게 길어지는 감이 있습니다.

내 일생에 장님의 생일을 잊지 않습니다. 올해 권사님 생일이 9월 16일인지는 권사님 뵐 수 있겠는지? 권사님의 생일 역시 저의 기억 속에 영원할 것입니다. 나보다 먼저 하루 ……

권사님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부닥치더라도 또 그 어떤 마귀나 사단의 시험에 든다 할지라도 하나님 아버지 말씀에 복종하고 뜻에 순종하며 따르는 마음 변함이 없이 살아갈 저를 의심치 마십시오.

저는 이 기회에 권사님의 지체 맡김을 주님께 빕니다.

2000년 6월 5일

장만식 올림

사모님께 보낸 편지 이미지 자료

사진 자료 설명

  • 첨부 이미지에는 장만식 아바이가 사모님께 보낸 손편지와 봉투 이미지가 함께 수록되어 있다. 원문 전체는 이미지 해상도상 완전한 판독이 어려워, 본 문서에서는 사진자료 캡션으로 보존하고 원본 이미지를 별도 아카이브 자료로 연결하는 것이 적절하다.

* 원본 사진은 정리 중입니다. 설명만 먼저 수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