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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장 이야기

4기 · 중국 1차 사역

자매 사역장

중국 1차 사역 / 3기 말~4기 사역 시기

소속 / 사역기수
중국 1차 사역 / 3기 말~4기 사역 시기
주요 사역 지역
서안, 보계, 연변, 한국
주요 인물
김금자, 은희, 온유, 지혜, 겸손, 화평
최종 기록
서안 전원 체포는 피했으나 이후 사역장 해체. 자매들은 연변으로 흩어졌고 일부는 한국에 정착

4기 · 사역장 기록

사역장의 기록

가족을 따라 중국에 온 북한 자매들을 품으며 시작된 첫 여성 공동체

오랫동안 미뤄 온 자매 사역

자매 사역은 중국 1차 사역 초기부터 계속 요청이 있었지만 오랫동안 시작하지 않았다. 당시 대부분의 사역장이 혈기 왕성한 북한 형제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형제와 자매가 함께 생활하면 사역 운영과 안전에 더 많은 어려움이 생길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갈 곳 없이 떠도는 북한 자매들을 만날 때마다 다른 선교사나 보호처로 연결해 주었다. 그러나 사역에 참여하는 형제들 가운데 아내와 자녀가 있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가족들을 외면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가족을 데리고 온 정용철 선생

연변으로 파송되었던 정용철 선생은 어느 날 아들과 딸을 데리고 돌아왔다. 별도의 자매 사역장도, 아이들을 돌볼 사람도 없었기에 두 아이를 선교사 가정으로 데려가 함께 생활하며 공부를 가르쳤다.

이 일을 계기로 사역자들의 가족 문제는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북한 선교는 훈련받는 개인만이 아니라 중국에 흩어져 살아가는 아내와 자녀들의 생존 문제까지 함께 품어야 하는 사역이었다.

사역장으로 찾아온 아내들과 자매들

3기 학생으로 들어온 유에녹 형제는 아내 김금자 자매를 데려왔다. 이미 찾아온 사람을 다시 돌려보낼 수 없어 선교사 가정에서 함께 생활하게 했다.

이후 김예진 형제도 아내 온유 자매를 데리고 왔다. 이용섭 선생은 아내 문제를 상담했고, 조봉희 형제는 갈 곳 없이 헤매던 누나를 받아 달라고 부탁했다. 윤병조 형제 역시 가족들이 중국 곳곳을 떠돈다며 도움을 요청했다.

선교사 가정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던 사람들

처음에는 찾아오는 자매들을 선교사 가정에서 보호하며 생활하도록 했다. 그러나 가족과 연고가 있는 자매들이 계속 늘어나면서 한 가정 안에서 모두를 돌보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졌다.

자매들을 받지 않겠다는 원칙만 고집할 수도 없었다. 결국 사역장에 참여하는 형제들과 가족 관계가 있는 자매들에 한해 받아들이고, 이들을 위한 별도의 공동체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김금자 선생을 중심으로 세워진 자매 사역장

선교사 가정에서 먼저 생활하며 성경을 배우던 김금자 자매가 자매 사역장의 책임을 맡았다.

정용철 선생의 딸 은희, 김예진 형제의 아내 온유, 이선장 선생의 동생 지혜, 4기생 장 형제의 아내 겸손, 신소광 선생 사역장 학생의 아내 화평이 함께 생활하며 자매 사역장을 이루었다.

형제 사역장에 퍼진 소문

자매 사역장이 생겼다는 소식은 서안의 여러 사역장에 빠르게 퍼졌다. 선생들과 학생들은 자매들이 몇 명인지, 언제 만날 수 있는지를 물으며 큰 관심을 보였다.

일부 형제들은 자신의 나이와 결혼 문제를 말하며 자매 사역장 사람을 소개해 달라고 노골적으로 부탁하기도 했다. 그대로 두면 형제 사역장 전체가 들뜨고 훈련에 집중하지 못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서안에서 한 시간 떨어진 도시로 이전하다

형제 사역장들과의 불필요한 접촉을 막고 자매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자매 사역장을 서안시에서 약 한 시간 떨어진 다른 도시로 옮겼다.

사역장은 보계시에 자리 잡았다. 물리적인 거리를 두면서 형제 사역장과 분리된 생활과 훈련 환경을 만들고자 했다.

준비 없이 시작된 첫 여성 공동체

자매 사역장은 충분한 계획이나 경험 없이 시작되었다. 사역의 필요가 먼저 생겼고,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람들을 받아 공동체를 운영해야 했다.

김금자 선생 역시 다른 북한 선생들처럼 장기간의 강도 높은 선교사 훈련을 마치고 책임자로 세워진 사람은 아니었다. 열정과 책임감은 있었지만 공동체를 조직하고 갈등을 조정하는 일에는 많은 시행착오가 따랐다.

끊이지 않았던 관계 갈등

서로 다른 상처와 생활 습관을 지닌 자매들이 한 공간에서 생활하면서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작은 말과 행동이 싸움으로 번졌고, 지도자의 말을 따르지 않는 일도 반복되었다.

형제 사역장에서는 강한 충돌 뒤에 관계가 정리되기도 했지만, 자매 사역장에서는 감정과 관계의 문제가 오래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운영자들은 자매 공동체를 이끄는 일이 전혀 다른 형태의 돌봄과 인내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다.

북한 선교를 준비하던 하 선교사

자매 사역장을 만들기 전, 하 선교사라는 여성 사역자가 중국으로 들어왔다. 그는 신학대학원 선배였고 북한 선교에 대한 이론적 지식과 큰 비전을 가진 사람이었다.

북한과 탈북민 문제에 관해서는 깊은 공부를 했지만 실제 북한 사람과 함께 생활한 경험은 없었다. 그는 현장 경험을 쌓기 위해 기존 사역과 동역하기를 원했다.

지혜 자매를 맡긴 첫 현장 훈련

마침 이선장 선생이 여동생 지혜 자매를 데리고 서안으로 와서 보호를 부탁했다. 지혜는 스무 살이 채 되지 않은 어린 자매였고 처음 만났을 때에는 얌전하고 말을 잘 듣는 사람으로 보였다.

하 선교사에게 지혜 자매 한 사람을 맡겨 함께 생활하며 북한 선교 현장을 경험하도록 했다. 하 선교사도 지혜를 만나고 좋은 마음으로 자신의 숙소에 받아들였다.

한 달 만에 병원에 실려 간 하 선교사

한 달 뒤 하 선교사에게서 다급한 전화가 왔다. 그는 기절해 구급차로 병원에 실려 왔고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다며, 생활비와 집을 마련해 줄 테니 지혜 자매를 다시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다.

훗날 지혜 자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자, 자신은 시키는 대로 착하게 생활했을 뿐이며 하 선교사가 자신 때문에 쓰러졌다는 사실도 몰랐다고 답했다.

함께 살아야 비로소 알 수 있었던 현장

자매 사역장을 직접 운영하면서 하 선교사가 왜 한 달 만에 쓰러졌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북한 선교에 관한 지식이 많아도 실제 사람의 상처와 행동을 매일 가까이에서 감당하는 일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사역은 강의나 상담 몇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식사와 생활 습관, 감정의 충돌, 가족의 상실과 생존 불안까지 하루 종일 함께 감당해야 했다.

형제 사역장 열 곳보다 힘들게 느껴진 한 곳

당시 사역자들은 자매 사역장 하나를 운영하는 일이 형제 사역장 여러 곳을 돌보는 것보다 더 어렵게 느껴졌다고 회고했다.

한 번 자매 사역장에 들어가 갈등을 조정하고 생활 문제를 해결한 뒤에는 며칠씩 몸이 아플 정도로 지쳤다. 이 경험을 통해 여성 탈북민 사역에는 별도의 지도 방식과 돌봄 체계, 충분한 여성 사역자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보계에 있었기에 피한 서안 전원 체포

자매 사역장은 서안에서 약 한 시간 떨어진 보계시에 있었다. 이 거리 때문에 2001년 서안의 모든 사역장이 중국 공안에 의해 동시에 체포될 때 자매 사역장만은 급습을 피할 수 있었다.

서안에 있었다면 자매들 역시 체포와 북송의 위험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계획하지 않았던 이전이 결과적으로 자매들을 보호하는 장치가 되었다.

서안 사건 이후 해체된 공동체

서안 사역장들이 무너진 뒤 자매 사역장을 계속 유지할 기반도 사라졌다. 지원과 지도 체계가 끊기면서 공동체는 해체되었다.

함께 생활하던 자매들은 각자의 연고를 따라 연변으로 돌아가거나 다른 지역으로 흩어졌다. 충분한 성경훈련을 마치지 못한 채 갑작스럽게 공동체를 떠나야 했다.

가족을 모두 잃은 지혜 자매의 고통

지혜 자매는 서안 사건으로 두 오빠와 아버지가 모두 체포되어 북한으로 끌려가는 일을 겪었다. 두 오빠는 정치범수용소로 이송되었고 아버지의 행방은 확인되지 않았다.

연변에 있던 어머니마저 북한으로 끌려갔다는 소식이 이어졌다. 어린 지혜 자매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상실이 한꺼번에 닥쳤다.

원망을 품고도 다시 찾아온 지혜 자매

지혜 자매는 가족들이 체포된 책임이 선교사와 사역장에 있다고 생각하며 오랫동안 원망했다.

그러나 훗날 한국에 정착한 뒤 다시 선교사님을 찾아왔다. 열방빛교회에 출석했고 김의환 목사님에게 세례를 받으며 중국에서 시작된 신앙의 인연을 이어 갔다.

사명을 이어 간 김금자 선생

자매들은 사역장이 해체되면서 성경을 충분히 배우지 못한 채 흩어졌지만, 책임자였던 김금자 선생은 북한 선교사라는 사명감을 놓지 않았다.

김금자 선생은 이후에도 사역자의 길을 계속 걸었다. 준비가 부족한 가운데 맡은 첫 공동체였지만, 그 경험은 북한 여성과 가족들을 위한 사역의 필요를 분명하게 보여 주었다.

자매 사역장이 남긴 역사적 의미

자매 사역장은 치밀한 전략으로 만들어진 조직이 아니라, 갈 곳 없는 아내와 딸과 누이들을 외면할 수 없어 시작된 공동체였다.

짧은 기간과 많은 시행착오에도 불구하고 이 사역은 북한 선교가 남성 지도자 양성만으로 완성될 수 없음을 보여 주었다. 여성 탈북민의 안전, 가족 회복, 상처 치유와 신앙훈련을 담당할 전문적인 여성 사역 체계가 필요하다는 중요한 과제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