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북도 도청 회계사에서 탈북민으로
석자실 선생이 사역장을 찾아왔을 때 나이는 쉰네 살이었다. 그는 북한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함경북도 도청에서 회계사로 일했다.
배급이 끊긴 뒤 먹을 것을 마련하기 위해 도청 창고의 철근을 몰래 팔았다가 3년형을 받게 되자 중국으로 탈북했다. 북한에는 1남 2녀의 자녀가 있었으며, 큰딸은 먼저 중국으로 넘어온 뒤 소식이 끊겼고 아들은 중국 산둥성 청도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중국 2차 사역
중국 2차 사역 / 자매 사역장 팀장
중국 2차 · 사역 기록
한국행만 바라보던 탈북 여성이 자매 사역장의 지도자로 변화된 여정
석자실 선생이 사역장을 찾아왔을 때 나이는 쉰네 살이었다. 그는 북한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함경북도 도청에서 회계사로 일했다.
배급이 끊긴 뒤 먹을 것을 마련하기 위해 도청 창고의 철근을 몰래 팔았다가 3년형을 받게 되자 중국으로 탈북했다. 북한에는 1남 2녀의 자녀가 있었으며, 큰딸은 먼저 중국으로 넘어온 뒤 소식이 끊겼고 아들은 중국 산둥성 청도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중국으로 넘어온 자실 선생은 한족 남성에게 팔려가 6년 동안 함께 살았다. 오랜만에 찾아온 아들에게 한족 남편이 차비라며 300위안만 건네는 모습을 보고, 자신과 가족이 돈으로만 평가받고 있다는 생각에 그 집을 나왔다.
이후 조선족 남성과 동거했지만 교통사고를 당해 얼굴뼈가 함몰되고 얼굴이 크게 찢어졌으며 다리까지 부러졌다. 치료 도중 보상금이 나오자 조선족 남편은 그 돈을 가지고 사라졌다.
중국 생활 10년 만에 몸은 크게 상했고 돈도 의지할 사람도 남지 않았다. 한국으로 보내 준다는 사람을 찾아갔지만, 그가 조직한 탈출팀이 연이어 중국 공안에 체포되어 북송되는 모습을 보고 불안을 느껴 사역장을 찾아왔다.
중국 2차 사역을 시작한 뒤 오랫동안 탈북민을 만나지 못했던 사역자들은 석자실 자매와 수영 자매, 수영 자매의 여섯 살 난 딸 영미를 하얼빈역에서 맞이했다. 채영희 목사와 백혜령 선생은 이들이 생활할 방과 가재도구를 준비해 두었다.
그러나 자매들의 관심은 오직 한국행이었다. 석자실 선생은 석 달 안에 반드시 한국으로 보내 달라고 요구했고, 1년 동안 성경을 배우자는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내일이라도 붙잡혀 죽을 수 있는 사람에게 1년을 기다리라는 말은 현실감이 없었다. 오랜 대화를 나누었지만 서로의 말이 닿지 않았고, 사역자와 탈북민 사이에 깊은 불신의 벽이 있음을 확인했다.
침묵 끝에 자실 선생은 사역장에서 생활하면 하루 식비를 얼마씩 주느냐고 물었다. 이전에 머물던 곳에서는 하루 5위안을 받았다고 했다. 탈북민들이 선교사를 신앙의 지도자보다 자신을 이용하거나 값싸게 관리하는 사람으로 먼저 경계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사역자들은 하루 20위안을 주겠다고 말했지만 실제로 현금을 나누어 주지는 않았다. 대신 매일 정성껏 식사를 준비하고 생활에 필요한 것을 세심하게 돌보았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존재로 존중받고 있다는 사실을 생활로 보여 주려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이용과 배신을 경험한 자실 선생의 마음이 열리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하얼빈에서 동계 유니버시아드가 열리며 단속이 강화되자 사역장은 가목사시로 피신했다. 그곳에서 만난 한 선교사가 자매들을 당장 한국으로 보내 주겠다고 제안하자 자실 선생은 말없이 그를 따라갔다.
며칠 뒤 자실 선생은 울면서 다시 돌아왔다. 그 선교사는 다른 자매들은 받아 주었지만 자실 선생은 외모를 이유로 거절했다.
자실 선생은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용서를 구했지만, 사역자들은 그를 미워하지 않았다. 한국으로 가고 싶어 하는 절박함과 여러 차례 이용당한 상처를 이해했기 때문이다.
사역장에서는 자매들과 함께 많은 시간을 기도에 사용했다. 교통사고 뒤 다리에 철심을 박아 무릎을 구부리지 못했던 자실 선생도 자신의 다리가 낫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이후 밖으로 튀어나와 있던 철심이 보이지 않게 되고 무릎을 자유롭게 움직이며 농구까지 할 수 있게 되었다고 공동체는 증언했다. 얼굴의 큰 상처도 눈에 띄게 회복되었고, 자실 선생과 자매들은 이를 하나님의 치유로 받아들였다.
자실 선생은 말씀을 반복해 읽으며 점차 기도하는 사람으로 변했다. 어느 날 갑자기 앞을 보지 못하게 되자 하나님께 도움을 구했고, 자신의 분노와 미움, 사역자들과 자매들을 공격한 일, 사역장을 떠난 일, 돈에 집착한 마음과 자신을 버린 사람들을 저주했던 일을 울며 회개했다.
다음 날 기도 모임에서 시력이 다시 밝아졌다고 증언한 자실 선생은 죄 사함과 용서의 기쁨을 표현하며 춤을 추었다. 그는 “천국이 하늘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여기가 천국”이라고 고백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 안정감과 담대함을 얻은 자실 선생은 자매 사역장의 팀장으로 세워졌다. 설교를 어려워했지만 성경 주석을 참고하며 준비한 뒤에는 서툴더라도 담대하게 말씀을 전했다.
앞으로 북한 자매들을 계속 받겠다는 말에 그는 백 명이라도 데리고 오라고 대답했다. 처음에는 두 달 안에 한국으로 보내 달라던 사람이 이제는 5년 동안 중국에 남아 북한 선교를 하고 싶다고 말할 만큼 방향이 달라졌다.
팀장으로 세워진 뒤 아들 성국이가 한국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자실 선생은 이를 오랫동안 품었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받아들였다.
어느 날 자실 선생은 처음에는 선교사도 자신을 이용하다 버릴 사람이라고 생각해 말을 듣지 않고 속을 많이 썩였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이제는 선교사의 마음을 이해하며, 자신이 관심과 사랑을 받는 것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선교사를 섬기고 사랑하며 축복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함께 눈물을 흘렸다. 북한 선교를 시작한 뒤 처음으로 북한 사람이 건네는 깊은 위로와 격려를 받은 순간이었다. 선교가 한쪽에서 베푸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두 영혼이 서로를 사랑하고 세워 주는 관계임을 보여 주었다.
사역자들은 중국에서 소식이 끊긴 자실 선생의 딸을 찾기 위해 여러 지역을 수소문했다. 치타이허에서 비슷한 시기에 팔려 온 북한 여성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추운 겨울밤 세 시간 동안 집 밖에서 기다렸지만, 감시가 심해 끝내 얼굴조차 확인하지 못했다.
한국에 먼저 입국한 아들 성국이는 정착금 300만 원 가운데 200만 원을 누나를 찾는 데 사용하라며 어머니에게 보냈다. 그러나 자실 선생은 그 돈을 사역장의 승합차 구입을 위해 헌금했다.
가난과 돈에 대한 한이 깊었던 사람이 자신의 전 재산과 같은 돈을 내놓으며 딸 진주의 일은 하나님께 맡기겠다고 고백했다. 자실 선생은 받기만 하던 사람에서 공동체와 다른 탈북민을 위해 자신의 것을 내놓는 지도자로 변화되어 있었다.
사역장에서 1년을 공부한 뒤 다른 자매들이 약속대로 자실 선생부터 한국으로 보내 달라고 요구했다. 중국에서 5년 동안 북한 선교를 하겠다고 서원했지만 공동체의 신뢰와 약속을 지키기 위해 결국 한국으로 입국했다.
한국에 온 뒤 아들 성국이가 인터넷에 누나를 찾는 글을 올렸고, 중국에 있던 누나가 그 글을 보면서 오누이가 다시 연결되었다. 자실 선생은 아들과 함께 중국으로 가서 오랫동안 찾던 딸을 만났다.
딸은 중국에서 웹디자이너로 일하며 안정적으로 살고 있었고, 오히려 어머니에게 생활비를 건넸다. 이후 딸도 한국으로 들어왔고, 아들은 결혼했으며 자실 선생도 좋은 배우자를 만나 새로운 가정을 이루었다.
기록 당시 자실 선생은 안산 동산교회 북한선교학교에서 북한 선교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의 삶은 한국행만을 요구하던 사람이 말씀과 사랑을 통해 치유되고, 다른 자매들을 품는 북한 선교사로 변화된 과정을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