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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이야기

1기 · 중국 1차 사역

김권능

중국 1차 사역 (1기) / 현 인천한나라은혜교회 담임목사

소속 / 사역기수
중국 1차 사역 (1기) / 현 인천한나라은혜교회 담임목사

1기 · 사역 기록

사역의 발자취

중국으로 넘어온 철없는 북한 청년

김권능 형제는 1997년에 북한을 탈북하여 중국으로 왔다. 김권능 형제의 아버님은 중국에 사촌 형제들이 있었기에 그들의 도움을 받아 김권능 선생을 비롯한 온 가족을 데리고 중국으로 넘어왔다.

가족들을 따라 중국으로 넘어온 김권능 형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철없는 북한 청년이었다. 친척들은 남루한 옷차림을 한 그에게 예비군복 한 벌을 입으라고 주었다. 북한에서는 구경도 해보지 못한 희한한 옷이었다. 김권능 형제는 너무 기뻐 이 옷을 입고 일부러 옌지시 시내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고 했다.

열흘을 그 옷만 입고 거리를 다니다가, 막일하는 인부들이 자기와 똑같은 옷을 입고 일하는 것을 보았다. 그때에야 중국에서는 그 옷이 인부들이 작업할 때 입는 작업복이었다는 것을 알고 많이 창피했다고 한다.

소림사에서 한껏 포즈를 취하고 있는 권능 선생

왕칭현 돌가루 공장에서의 첫 만남

내가 김권능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지린성 지린시에서 1기 사역을 하고 있을 때였다. 칼빈 형제가 주광호 선생에게 김권능 형제와 익두 형제를 소개해 주었다. 주광호 선생은 두 형제의 행적을 찾아 옌볜 조선족 자치주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 왕칭현 동명촌 돌가루 공장에서 두 형제를 찾았다.

그곳에는 김권능, 허익두 형제 외에도 여러 명의 북한 형제들이 있었다. 북한 형제들은 큰 바위를 깨서 돌로 만들고, 다시 분쇄기에 넣어 가루로 만드는 일을 했다. 고된 노동이었고 위험하기도 했다. 노동 현장에는 아무런 안전장치가 없었다. 파쇄장은 돌가루가 뽀얗게 흩날려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었다.

북한 형제들은 천으로 만든 간단한 마스크를 쓰고 돌을 퍼서 파쇄기 안에 집어넣고, 한쪽으로 흘러나오는 돌가루를 마대자루에 포장하고 자동차에 실으면서 하루 종일 끔찍한 노역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곳에서 몇 달만 일하면 폐 안으로 돌가루가 들어가 쌓여 폐병이 된다고 했다. 가난한 중국인들도 하려고 하지 않는 일이었다.

이 무서운 고역의 대가는 하루 세끼 식사가 전부였다. 먹는 것도 변변하지 않았다. 얼마간의 쌀과 채소, 한 주일에 한 번씩 공급되는 약간의 고기가 전부였다. 그러나 북한 형제들은 불평하지 않았다. 이런 곳에서나마 일을 하고 밥 먹을 곳이 있다는 것에 만족해하고 있었다. 주광호 선생이 김권능 형제를 데리고 왔을 때 그는 키가 작고 가벼운 곱슬머리에 몸집도 허약한 스물다섯 살 청년이었다.

불고기와 냉면, 그리고 믿기 어려운 풍성함

김권능 형제가 온 후 우리는 식당에 가서 불고기를 잔뜩 사 먹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냉면도 사 먹었다. 김권능 형제는 처음에 혼란스러워했다. 모든 것이 믿기 힘들 정도로 풍성했고 만족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는 “세상에 이런 곳이 다 있느냐”고 했다. 아무런 일도 안 하는데 먹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먹고, 좋은 아파트에서 잠도 재워주고, 안전도 지켜준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이냐고 했다. 내가 볼 때에는 별로 대단한 대접도 아니었고 아파트도 좋아 보이지 않았지만, 김권능 형제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좋아했다.

김권능 형제는 가족들이 모두 탈북하여 옌볜 조선족 자치주 깊은 산속에서 풀로 초막을 짓고 숨어 지낸다고 했다. 그래서 늘 자기만 이런 사역장에 와서 잘 먹고 잘 산다고 부모님과 동생들에게 미안해했다. 가족들 때문에 마음 아파하고 걱정하는 김권능 형제에게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자고 했다.

김권능 형제가 물었다. “기도하면 어떻게 되는데요?” 나는 대답했다. “하나님께서 김권능 형제님의 가족들을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실 거예요.”

김권능 형제는 나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는 북한에서 전문대까지 공부했던 사람이라 북한 사람답지 않게 감정적이지 않았고, 이성적이고 냉철했다. 성경공부도 별로 힘들어하지 않고 열심히 했다. 하지만 생각이 많은 편이었다. 이런 성경공부를 하면 밥 먹고 살 수 있느냐, 인생이 풀리느냐, 기도만 하면 가족들의 문제가 해결되느냐고 고민했다. 김권능 형제는 늘 조용히 앉아서 공부하고 사색했고, 나와 마찰은 전혀 없었다.

백두산 기도모임과 남겨진 형제들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북한선교팀으로부터 우리 사역장에 요청이 왔다. 백두산, 중국명 창바이산에 모여 함께 북한을 위한 연합기도모임을 하자는 것이었다. 백두산을 구경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모두가 좋아했다. 그러나 연합회 쪽에서 일곱 명만 데리고 오라고 했기에 우리는 다 갈 수 없었다.

결국 사역장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김권능, 익두, 민선주 형제들이 남기로 했다. 주광호 선생은 그들에게 우리가 가는 길은 놀러 가는 길이 아니라 한기총에 사역장의 존재를 알리고 북한선교를 위해 연합하는 자리이며, 열차에서는 중국 공안들 때문에 위험하니 남아서 통독하고 금식하며 중보기도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성질 급한 익두 형제가 발칵 뒤집어졌다. “그래, 니들은 백두산 구경 가고 우리는 집안에 처박혀서 공부만 하라고! 그것도 모자라서 밥도 먹지 말고 금식이나 하라고!” 그때 김권능 형제가 제안했다. “당신들은 좋은 구경하고 우리는 맛있는 거나 많이 사 먹을 테니까 식비나 넉넉히 주십시오. 그러면 참겠슴다!”

김권능 형제의 제안에 내가 찬성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에게 미안했다. 그들에게 식비를 넉넉하게 주고 백두산으로 다녀왔다. 돌아와서 무엇을 해 먹었느냐고 물으니, 고기를 실컷 사 먹고 통독도 별로 하지 않고 맨날 찬양만 부르면서 재미있게 놀았다고 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에서 주최한 백두산 기도회에서 특송을 하는 1기생들

정저우 사역장과 사진 속 행복한 날들

얼마 후 우리는 허난성 정저우시로 이사를 갔다.

북한 형제들은 사진 찍기를 참 좋아했다. 틈만 나면 나 몰래 사진을 찍었다. 나는 안전 문제 때문에 말렸지만, 그들은 찍어야 한다고 했다. 언젠가 북한으로 돌아가면 이웃들과 친구들에게 이 사진들로 자기들이 누렸던 모든 것을 자랑하고 싶어 했다.

내가 볼 때에는 특별히 자랑할 만한 것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북한 형제들에게는 지금 자기들이 누리고 있는 평범한 순간 하나하나가 인생에서 지우고 싶지 않은 풍요로운 순간들이었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마음이 아프다. 북한의 정치범수용소 안에서 그들은 이때의 나날들을 다시 회상하고, 행복했던 그때를 그려볼 것이다. 그들의 말대로 이 평범한 순간들이 북한 형제들의 삶 속에서는 지우고 싶지 않은 가장 행복한 순간들이 되었다. 감옥에서 편지를 보내면서 김권능 선생은 이때의 추억이 가장 아름다웠고 행복했다고 했다. 한국에 와서 살아가고 있는 형제들도 한결같이 말했다. 그때 중국에서 공부하던 때가 가장 행복했고 그립다고.

“그게 북한임다”

사역을 시작하고 그동안 돌보지 못한 아내와 아이들 생각에 힘들어 나는 5일 작정 금식기도에 들어갔다. 5일 금식이 끝나는 날 김권능 선생이 담담한 어조로 나에게 말했다. “선생님, 배 마이 고팠지 않았슴까?”

나는 웃으며 농담하듯 말했다. “아니. 난 괜찮은데…” 김권능 선생도 피식 웃으며 다시 말했다. “선생님, 이리케 열흘을 쫄쫄 굶어두 먹을 게 암것두 없다구 함 생각해 보십쇼. 그게 북한임다.”

북한 실정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감이 잘 오지 않았는데, 김권능 선생의 말을 듣고 조금 감이 잡혔다. 그러나 그는 그 정도의 감도 반이 안 된다고 했다.

추운 겨울, 네다섯 살 아이들이 눈 쌓인 거리에서 헤매다가 역전에서 죽어가면서도 울지 않는다고 했다. 어느 한 구석 의지할 데가 없으니 울어야 할 이유조차 찾지 못한다고 했다. 그 비참한 상황을 고스란히 자기들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불평 한마디 없이 다음 날이면 시체로 변한다고 했다.

공원, 필름 한 통, 그리고 대학 캠퍼스

정저우시에서 공부할 때 북한 형제들은 공원으로 들어가 보겠다고 떼를 부렸다. 그곳은 아이들이나 들어가는 곳이라고 내가 만류했지만, 하도 떼를 쓰는 바람에 들어갔다.

공원에 들어가니 또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제일 뒤에 서서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김권능 형제였다. 이때 익두 형제는 김규성 전도사님의 아들 종윤이를 업고 다녔다. 어른들이 여기저기 뛰어다니니 아이가 미처 따라다니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권능 형제는 공원 이곳저곳을 쏘다니면서 자꾸만 감탄했다. 그때마다 사진을 찍었다. 남기고 싶다고, 자기 동네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다고 했다. 공원으로 들어가면서 36장짜리 코닥 필름 한 통을 샀다. 한 통이면 충분하리라고 생각했지만 김권능 형제와 기풍 형제가 순식간에 몽땅 찍어버렸다.

우리는 토요일 오후면 가까운 대학교 운동장에 가서 운동을 했다. 몇 개월 동안 정저우대학교 운동장에서 축구를 했다. 너무 자주 다녔더니 노출될 것 같아 정저우항공대학교 캠퍼스로 가서 공을 차기 시작했다.

정저우항공대학교에서는 대학 문화를 맛보라고 캠퍼스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처음에는 주눅이 들어 불편해하더니 한족 대학생들과 어울리기 시작하면서 좋아했다. 자기들도 대학생이 된 기분이라고 들떠 했다. 자신들도 성경공부를 한다는 것과 앞으로 선교사가 된다는 생각으로 자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북한 출신 선교사 임명과 소림사 여행

정저우 사역장에서 설교 훈련과 지도자 과정까지 마치고 나서 북한 형제들은 정식으로 북한 출신 북한선교사들로 임명되었다. 이 일을 기념하여 우리는 허난성 정저우시 인근의 유명한 곳을 여행 다녀오기로 했다. 정저우에서 유명한 곳은 황허와 덩펑시 숭산 소림사 둘뿐이었다. 나는 황허로 가보고 싶었지만, 북한 선생들은 중국 무술 영화에서 자주 보던 소림사로 가보고 싶어 했다.

소림사로 갔을 때 김권능 선생은 말은 별로 하지 않았지만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기뻐했다. 여행하는 내내 컵라면과 과자가 잔뜩 들어 있는 봉투를 손에서 놓지 않고 다녔다. 어차피 먹을 때에는 다 같이 먹어야 했지만, 꼭 자기가 들고 다니고 싶어 했다.

김권능 선생은 즐거운 일이 생길 때마다 가족들을 생각하며 미안해했다. 가족들은 고생하는데 자기는 너무 행복하다고 죄책감에 시달렸다. 우리가 자주 그의 가족들을 위해 기도했지만, 김권능 선생은 기도를 믿지 않았다.

총신대학교 총장이신 김의환 총장님은 우리 사역장에서 성경을 100독 이상 읽고 훈련받은 탈북자들에 대해서는 총신대학교 총장 직권으로 전도사 자격증을 주기로 했다. 이들은 북한 탈북자 출신 전도사가 되어 북한선교를 하게 될 것이었다. 김권능 선생은 나의 말을 믿지 않았다. “우리가 뭐 그렇게 되겠습니까?” 그러다가 이들을 북한선교사로 임명하고 파송조를 짜는 날에야, 내가 했던 말들이 사실이라는 것을 조금씩 인정하기 시작했다.

숲속 오두막 마을과 하나님의 공급

김권능 선생은 파송되어 제일 먼저 가족들이 숨어 살고 있는 숲속 오두막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부모님들뿐 아니라 수많은 탈북자들이 함께 모여 살고 있었다. 그의 가족들을 알고 있던 북한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오두막으로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그곳은 은밀하고 가난한 북한 탈북자들의 마을이 되어 있었다.

김권능 선생이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내 없는 동안 어떻게 살았슴까?” 김 아바이는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신나게 설명했다. 쌀이 다 떨어져 갈 때면 아래 동네 사는 전도사님이 쌀을 들고 올라오고, 또 떨어질 때쯤이면 지나가던 사람이 먹으라고 쌀을 주고, 캐나다라는 나라에서 선교사라고 하는 사람이 와서 돈과 옷까지 주었다고 했다. 이 사람 없는 심심산골에 들어오면서 어떻게 살까 걱정했는데, 꼭 누가 보는 것처럼 공급해 주더라는 것이었다.

정말이었다. 사역장에서 배웠던 모든 것들은 사실이었다. 그들의 기도에 하나님은 정말 신실하게 응답하고 계셨다. 김권능 선생은 기도하면서도 믿지 못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고 고백했다.

김 아바이가 사는 산속으로 북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낮에도 찾아오고 한밤중에도 찾아왔다. 김 아바이는 찾아오는 사람들이 불쌍해서 쫓아버리지 않고 데리고 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사람 두 사람 모여든 것이 잠깐 사이 20여 명으로 늘었고, 나중에는 80여 명에 이르는 큰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 산 아래 마을과 파출소에서는 사람들이 떼로 모여 있다가 어느 날 한꺼번에 싹 사라지곤 하는 이곳을 ‘북조선 사령부’라고 불렀다.

80명 가까운 사람들이 먹고 살 양식은 하나님이 공급해 주셨다. 헤이룽장성 이란현 조선족 교회에서는 선교사님들이나 목사님들이 탈북자들을 만나보고 싶어 하면 제일 먼저 이곳으로 안내했다. 교회에 구제 물자가 들어오면 이곳으로 보내주었고, 비닐하우스를 지으라고 비닐까지 보내주었다.

며칠 동안 숲속 마을에서 지내다 사역하러 떠나면서 김권능 선생이 아버님께 부탁했다. “사람들이 오면 보내지 말고 꼭 데리고 있으세요. 다시 학생 모집 나오면 데려갈 거예요.” 이후 2000년까지 200명에 가까운 학생들이 김권능 선생 아버님과 그의 가족, 친척들의 소개로 우리 사역장에 들어왔다. 김권능 선생 부모님의 산속 마을은 우리 사역장으로 오기 위한 1차 집결지가 되었다.

김권능 선생의 형제들. 모두 통독반 학생들이 되었다

13명의 학생 모집과 첫 사역의 시작

하나님의 신실한 응답하심과 가족들에게 주신 은혜를 경험한 김권능 선생은 완전히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이 되었다. 북한선교 사역에 열의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요한 선생의 동생인 박다윗 형제를 비롯하여 정모세, 이만식, 김국철 형제 등 13명의 형제들을 모집하였다.

학생을 모집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김권능 선생은 말했다. “선교사님, 그동안 물질의 어려운 과정을 겪으면서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이 채우시는 것을 직접 체험했슴다. 저도 선교사님처럼 이제 북한선교사로 세워졌으니 앞으로 저도 사람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사역하겠슴다. 물질이 없을 때 사람에게 손 내밀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공급받아 사역을 하겠슴다.”

학생들도 모집하였고 사역을 시작해야 했지만 사역비가 없었다. 사역비가 마련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칼빈 선생과 요한 선생이 북한 보위부에 납치되어 가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모집된 학생들은 불안에 떨기 시작했고 북한 선생들도 초조해했다. 그때 산둥성 칭다오시 청도한인교회 김무종 목사님이 우리의 사정을 알고 많은 돈을 헌금해 주셨다. 그 돈으로 김권능 선생과 우리는 사역을 시작할 수 있었다.

지난행 열차에서의 체포 사건

김권능 선생의 첫 번째 사역은 시작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김권능 선생은 나와 함께 13명의 학생들을 데리고 산둥성 지난시로 출발했다. 그러나 열차에서 사고가 생겼다.

학생들 중 진명, 영광, 주명, 에녹 형제가 안전한 남쪽으로 간다고 들뜬 기분에 카드놀이를 시작했다. 김권능 선생과 내가 아무리 말려도 아랑곳하지 않고 심하게 떠들었다. 철도 공안이 와서 다른 손님들의 편의를 위해 좀 조용히 해 달라고 부탁했다. 북한 형제들은 중국 공안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공안이 이상하게 여기며 신분증 제시를 요구했고, 그들은 바로 열차 공안실로 연행되었다가 그 길로 곧장 북한으로 강제 북송되었다.

눈앞에서 북한 형제들이 잡혀가는 광경을 목격하면서 나와 김권능 선생은 한마디 말도 할 수 없었다. 언젠가 주광호 선생이 모녀가 같이 열차를 타고 가다가 엄마 앞에서 딸이 잡혀 가도 두 눈 멀뚱히 뜨고 쳐다만 봐야 한다고 하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세상에 많은 아픔들이 있다지만 이렇게 비참한 고통은 처음이었다. 김권능 선생도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지난시에 도착할 때까지 한잠도 자지 못했다. 지난시에 도착해 보니 그의 눈이 움푹 들어가 있었다.

박다윗 형제 사건과 3일 금식기도

김권능 선생은 사역을 시작한다는 기쁨을 잃었다. 그와 형제들 모두 말없이 침울했다. 김권능 선생 팀 형제들은 대부분 그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다. 큰 문제에는 순종했지만 작은 문제들은 잘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위험한 북한 사역에서는 소홀히 넘어갈 수 있는 작은 문제들이 더 중요했다.

김권능 선생의 팀에는 순교자 요한 선생의 동생인 박다윗 형제가 있었다. 사역이 시작되자 박다윗 형제가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성경을 가르치는 김권능 선생을 주먹으로 위협했고, 통독하는 형제들을 방해했다. 새벽기도 시간에는 통독실에 들어가 온 아파트가 흔들릴 정도로 녹음기를 크게 틀어놓았다. 통독 시간에는 옆방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노래를 불러댔다.

다윗 형제는 귀신에 사로잡혀 있었다. 귀신 들린 사람을 본 적 없는 북한 형제들은 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형제들은 거의 매일 반복되는 횡포에 시달리다 못해 사역장을 떠나고 싶어 했다. 김권능 선생은 아무리 기도해도 다윗 형제가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자 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내가 갔을 때 다윗 형제는 완전히 귀신에 사로잡혀 있었다. 방바닥에서 뱀처럼 기어다니며 혀를 날름거리고 사람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내가 도착하자 그는 “선생님, 지난까지 뭐 타고 왔슴까?”라고 물었다. 내가 열차를 타고 왔다고 하자 그는 “어떻게 열차 타고 왔어, 하나님이 보내서 왔지. 나는 사단이 보내서 왔구”라고 말했다.

사역장의 모든 북한 형제들이 기도하자 다윗 형제의 반응이 순해지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시편 23편을 줄줄 암송하고, 박주안 선교사님이 5분 후에 올 것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5분 후 박주안 선교사님이 들어섰다. 형제들은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나는 “악한 영들도 성경을 잘 알아요. 그래서 믿음이 견고한 성도들을 공격할 때 악한 영은 반드시 성경을 이용하여 공격해요”라고 설명했다. 그제야 형제들은 다윗 형제가 귀신에 들렸다는 것을 인정하고 진지하게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윗 형제는 쉽게 깨어나지 않았다. 나는 사역장 전원이 다윗 형제를 위해 3일 금식기도를 하자고 제안했다. 김권능 선생은 아직 담배와 술 때문에도 힘든 사람들이 금식을 할 수 있겠느냐고 걱정했다. 내가 직접 설득했고, 다음 날부터 우리는 바울 선생 사역장 형제들과 함께 3일 작정 금식기도에 들어갔다.

마지막 날에는 지난시에서 가장 높은 첸포산, 천불산에 올라가 밤 9시부터 철야기도를 했다. 계속 보혈 찬송을 부르며 “예수 이름으로 명령하노니 귀신아 나가!”라고 꾸짖으며 기도했다. 새벽 1시쯤 되니 다윗 형제가 갑자기 정신을 차리는 듯 보였다. 그는 기도하고 있는 형제들에게 “너희들 왜 이렇게 나에게 관심을 가지니?”라고 물었다. 형제들은 “기도하니까 진짜루 귀신이 떨어져 나간다야! 예수님 이름이 이리케 쎈지 정말 몰랐슴다!”라며 감격했다.

사역장에 돌아왔을 때 다윗 형제는 완전히 제정신을 찾았다. 그는 자기가 했던 행동을 몹시 부끄러워했고, 그 후부터 열심히 성경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성경공부뿐 아니라 사역장 생활의 모든 면에서 모범이 되려고 애썼다.

지친 김권능 선생과 다시 시작된 청두 사역

다윗 형제의 일이 정리되자 다윗 형제는 회복되었지만, 김권능 선생은 완전히 진이 빠져버렸다. 사역 첫 시작부터 다윗 형제 사건은 그에게 너무나 큰 시련이었다. 게다가 다른 형제들이 매일같이 크고 작은 사고를 치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지친 김권능 선생은 더 이상 버텨내기 힘들어했다.

결국 김권능 선생은 한동안 사역을 포기하고 쉬고 싶다며 아버님이 살고 있는 옌볜 조선족 자치주의 숲속 마을로 돌아갔다. 나도 그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러나 숲속 마을로 돌아간 김권능 선생은 쉴 수 없었다. 그곳에는 이미 그가 오기를 기다리는 많은 북한 형제들이 있었다.

그는 결국 최순교, 정용철, 강규홍, 김누가, 김권위, 조선족 최원초, 조선족 최빌립 형제 등 9명의 형제들을 이끌고 쓰촨성 청두시로 내려가 사역을 시작했다. 하루도 변변히 쉬지 못하고 새로운 사역을 시작해야 했던 것이다.

2기 때부터는 여러 개의 사역장을 운영하다 보니 여행을 가도 한 팀씩 차례대로 돌아가야 했다. 제일 처음으로 김권능 선생 팀이 갔다. 이 기회에 가족들도 여행시키고 싶어 함께 칭청산과 두장옌 쪽을 다녀왔다. 그런데 이것이 화근이 되었다. 북한 사람들은 질투가 많았다. 다른 사역장이 자기들보다 조금이라도 좋은 곳으로 갔다고 하면 난리를 부렸다. 그래서 빵 자르듯이 똑같이 해야 했다.

11명의 북한선교사를 파송하다

김권능 선생은 두 번째로 시작한 사역장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자신이 가르치던 모든 학생들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시켰고, 그들에게 다시 북한선교사의 훈련을 주어 옌볜 조선족 자치주로 파송시켰다.

김권능 선생은 1기생들 중 가장 연약하고 소심한 성격이었다. 사역 과정에서 너무 많은 시련과 어려움을 만났지만 그는 인내했다. 그 소심하고 침착했던 사람이 너무 힘들어서 고함을 지르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하고, 눈물을 뚝뚝 흘리기도 하면서 고통스러워했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을 견디어냈다. 그는 학생들을 키웠고 파송했다.

김권능 선생 팀에서 파송된 선생들은 장만식 아바이, 정모세 선생, 정용철 선생, 최순교 선생, 조선족 최빌립 선생, 조선족 최원길 선생, 김성근 선생, 강석환 선생, 김권위, 김누가, 강규홍 선생이었다. 모두 11명이었다.

경이로운 기적이었다. 수년을 학문과 선교훈련을 받은 선교사들도 이루어내기 힘든 성과였다. 그것을 하나님을 영접한 지 1년밖에 되지 않은 연약한 북한 청년이 이루어냈다. 이때 김권능 선생의 나이는 스물다섯 살이었다.

북한선교사들이 파송되기 전 김의환 목사님이 우리 사역장에 오셔서 북한선교사들에게 세례식을 인도해 주셨다. 김의환 총장님은 성경 100독 이상을 읽고, 말씀을 수백 절씩 암송하고, 설교 훈련을 받고 북한 출신 북한선교사로 세워진 김권능 선생 팀 북한 형제들에게 한 사람씩 세례를 주셨고 성착식까지 해주셨다. 김권능 선생도 김의환 총장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권능 선생 사역장의 학생들

시안 사역장 관리와 갈등

김권능 선생이 파송한 선생들은 정모세 선생을 제외하고는 모두 무사히 학생 모집을 마치고 산시성 시안시로 돌아왔다. 정용철 선생, 장만식 선생, 강규홍 선생, 김누가 선생, 강석환 선생들이 시안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이렇게 3기 사역이 시작되자 김권능 선생은 시안에 있는 다섯 개의 사역장을 관리했고, 나는 그 나머지 사역장들을 관리했다.

옌볜의 숲속에서 숨어 살던 한 탈북 청년이 2년간의 훈련을 통해 수십 명의 북한 탈북자들을 양성하는 선교사가 된 것이다. 이것은 기적이었다.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었다.

한 사람이 여러 개의 사역장을 관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김권능 선생은 수많은 행정업무와 동시에 탈북자들을 양육하고 사역장들을 관리하는 일을 혼자 맡아야 했다. 내가 한국에 나가 있을 때에는 김권능 선생이 전체 사역장을 관리해야 했다.

탈북자들은 말썽이 많았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서로 싸우고, 피가 터지고, 도망가고, 사고를 냈다. 환자들도 계속 생겼다. 언제나 많은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김권능 선생을 내리눌렀다. 그래도 그는 힘들다는 말도 없이 묵묵히 감당했다.

어느 날 김권능 선생이 말했다. “선교사님, 저 옌볜으로 올라가렵니다.” 나는 관리가 힘들어 푸념하는 소리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강경했다. “저 이제 더 이상 이 사역 못하겠슴다. 그만 돌아갈까 봅니다.”

그가 문제 삼은 것은 글을 읽을 줄 모르는 학생들을 돌려보낸 일이었다. “저는 선생님이 하시는 이런 사역 방식이 납득이 안 돼요! 왜 자꾸 사람들을 돌려보내요? 그 사람들이 옌볜으로 돌아가면 집이 있슴까? 친척이 있슴까? 어디 가라는 검까?”

나는 몇 시간째 사정을 설명했다. 글을 모르는 학생들을 일부러 등 떠밀어 보내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들이 통독과 훈련 과정을 견디지 못해 어쩔 수 없이 돌려보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같은 탈북자의 입장에서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그는 결국 다음 날 간단한 인사만 남기고 떠나버렸다.

김권능 선생이 올라간 후 팔 하나가 떨어져 나간 것 같았다. 그는 이 사역에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처럼 성경을 많이 공부하고 깨달았을 뿐 아니라 풍부한 사역 경험을 쌓은 북한선교 일꾼은 아직 나온 적이 없었다. 나는 아픈 마음으로 그를 보내며, 하나님께서 어디를 가든 붙드시고 더 크고 귀한 사역자로 키워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탈북자 구출 사역과 체포

우리 사역장을 떠난 김권능 선생은 그때부터 탈북자들을 남한으로 구출하는 사역을 시작했다. 훗날 우리 사역장이 산시성 시안시에서 전부 체포되어 북한으로 북송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를 찾아왔다. 김권능 선생은 나를 도와 다시 중국으로 돌아오는 우리 사역장 형제들을 남한으로 구출하는 일을 했다.

제일 마지막 형제까지 한국으로 무사히 보내고 뒤따라 들어오던 김권능 선생은 중국 공안에 체포되었다. 많은 사람들을 죽음의 땅에서 구출해냈지만, 정작 본인은 그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체포되었다. 가장 살리고 싶은 선생이 체포되었다. 김권능 선생이 체포될 무렵 이 일을 함께 했던 이용섭 선생도 체포되었다.

한국에 온 선생들과 형제들이 두 선생을 빼내기 위해 모금을 했고, 아는 분들을 총동원해서 해법을 모색했지만 두 선생을 구출할 수는 없었다. 중국 공안은 두 선생이 수많은 탈북자들을 한국으로 보낸 사실을 알고 일반 탈북자가 아니라 중국의 중죄인처럼 취급하기 시작했다. 두 선생은 북송이 보류되었고 중국 인민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용섭 선생은 4년 판결을 받았고, 김권능 선생은 12년 형을 받았다.

재판을 마치고 중국 검찰은 김권능 선생에게 말했다. “너는 영웅이다. 지금은 중국의 법을 어겼으니 판결을 받아야 하지만, 역사는 너를 인정해 줄 거다. 너를 누가 가르쳤느냐?” 김권능 선생은 2002년 7월부터 지린성 창춘시 철베이 감옥에서 수감 생활을 시작했다.

정치 난민 청원과 철베이 감옥 면회

김권능 선생의 상황은 위험했다. 중국은 자국 내에서 범죄 활동을 하다가 판결을 받고 형을 마친 탈북자들을 북송하면서, 형을 받은 이유와 판결서까지 북한 정부에 넘겨준다고 했다. 그렇게 되면 수많은 탈북자들을 남한으로 보냈고, 본인도 남한으로 가다가 체포된 김권능 선생을 북한 정부가 그냥 두지 않을 것이었다.

김권능 선생은 두려워했다. 나는 한국에서 정치적으로 영향력 있는 분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의 상황을 국제사회와 유엔에 알려서 어떤 형태의 도움이든 받아, 북한으로 북송되는 것을 막고 싶었다. 이때부터 김권능 선생과 편지로 서로 안부를 주고받았다.

나는 김권능 선생의 정치 난민 신청서를 가지고 갈 수 있는 곳은 다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김권능 선생을 살려 주십시오. 이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체포된 사람들입니다. 김권능 선생은 북한으로 북송이 되면 사형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북한선교 담당자를 통하여 유엔 사무실에도, 미국 대사관과 한국 외교부에도 청원서를 내고 도움을 요청했다. 몇 년을 열심히 뛰어다녔지만 뚜렷한 성과는 없었다.

나는 김권능 선생이 있는 감옥으로 가서 그를 만나보고 싶었다. 그의 부모님들과 주변 사람들은 모두 반대했다. 그래도 나는 그를 만나고 싶었다. 나는 기도하기 시작했다. 중국 지린성 창춘시에 있는 24시 기도의 집 팀장인 소망 선생님과 식구들에게 김권능 선생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다. 한 달 후 소망 선생님과 기도 식구들과 함께 창춘 철베이 감옥을 한 바퀴 돌면서 기도했다. 살을 찢는 눈보라 속에서 10리가 넘는 철베이 감옥 둘레를 돌며 울면서 기도했다.

그 후 김권능 선생의 부모님과 남동생, 여동생이 면회하러 갈 때 나도 따라가기로 했다. 입구에서 문을 지키는 공안이 김권능 선생 가족들의 여권까지 조사하면서도 나에게는 여권을 보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가족들과 섞여 면회장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김권능 선생을 만났다. 내가 면회 올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그는 나를 보고 충격을 받았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면회장의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아무 말 없이 울기 시작했다. 하고 싶은 말은 산처럼 많았지만 정작 만나니 할 말이 없었다.

한참 후 김권능 선생이 “선생님……” 하고 말했다. 나는 “그래……”라고 대답했다. 마이크에서 갑자기 공안의 안내 멘트가 흘러나왔다. “마이크가 고장 난 것 같으니 다른 쪽 마이크를 사용하세요.” 도청하고 있던 공안이 둘 사이에 아무 말소리도 들리지 않자 마이크가 고장 난 것으로 판단한 모양이었다.

공안을 의식한 김권능 선생이 먼저 말했다. “많이 늙었습니다. 선생님.” 나는 말했다. “너는 건강하니? 기도 많이 해라. 우리도 기도 많이 하고 있다. 최선을 다해 보자. 건강하게 나와서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해야지.”

뒤쪽에서 한 공안이 나를 불렀다. 끌려 들어간 방은 도청실이었다. 공안은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는 고함을 질렀다. “너 말이야, 어디 가서 절대로 면회했다는 말을 하지 마! 누구한테도 면회했다는 소리를 하게 되면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이어 그는 김권능 선생의 아버님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 “왜 목사를 데리고 왔어? 여기가 어딘지 알기나 알아? 내가 어디까지 당신들을 봐 줘야 해?”

살았다. 온몸이 쪼그라들 것 같은 공포 속에서 도망치듯 나왔다. 그러나 감옥을 빠져나왔지만 서러웠다. 북한 사람이라는 이유 때문에, 단 하나 그 이유 때문에 다른 나라 사람 같으면 죄도 아닌 죄를 가지고 12년씩 감옥을 살아야 했다. 어린 김권능 선생은 감옥 안에서 젊은 청춘을 다 잃어야 했다.

감옥 안에서도 이어진 사역

김권능 선생과 용섭 선생은 감옥 안에서 최고의 모범수들이 되었다. 3,000명 이상의 범죄자들이 살고 있는 감옥 안에서 모든 죄인들과 간수들까지 다 아는 모범수가 되었다. 이 때문에 김권능 선생은 2년을 감형받았다. 그러나 난민 신청서는 아직 어떤 결과도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2년 감형은 북한으로 북송될 시간만 앞당기는 일이었다.

김권능 선생은 감옥 안에서도 사역을 했다. 내가 돈을 보내면 그 돈을 혼자 사용하지 않고 감옥 안에 있는 다른 북한 형제들과 나누어 썼다. 그리고 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다른 북한 형제들은 대부분 잡범들이었다. 그들은 몇 달 정도 감옥에 구류되어 있다가 북한으로 북송되어 나갔다.

김권능 선생과 함께 체포되었고 함께 재판을 받고 복역하던 이용섭 선생이 북송되었다. 아무런 예고도 없었고 갑자기 일어난 일이었다. 두 선생이 북송되지 않고 제3국이나 남한으로 추방되게 하려고 수많은 노력을 했지만 결국 용섭 선생은 북송되었다. 북한 정부는 용섭 선생은 물론, 북한에 살고 있는 그의 아내와 딸까지 함께 정치범수용소로 보냈다. 탈북자들이 공개처형보다 더 두려워하는 결과를 만난 것이다. 용섭 선생이 북송되고 김권능 선생에게서 다시 편지가 왔다.

대한민국 입국과 현재의 사역

이용섭 선생이 북송되고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자 나는 김권능 선생의 구출을 더 이상 국제 정치권에만 의지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방향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김권능 선생의 부모님과 동생, 가족들은 현재 전부 한국에 와 있었다. 이제 김권능 선생은 북한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가 반드시 북한으로 북송되어야만 한다는 법도 없었다.

나는 중국의 합법적인 재판 절차를 통해 그를 북한이 아닌 제3국으로 추방시키려는 노력을 시작했다. 그렇게 김권능 선생은 긴 옥중의 삶을 마치고 2012년 3월 대한민국으로 입국할 수 있었다.

김권능 선생의 제자들 가운데는 최순교, 김누가, 정용철, 강규홍, 장만식, 정모세, 김권위, 최원길 등이 있었다.

옌볜의 숲속에서 숨어 살던 한 탈북 청년이 성경을 배우고, 사역자로 세워지고, 북한 출신 선교사들을 파송하고, 수많은 탈북자들을 살리는 길에 서게 되었다. 그 과정은 고통과 실패와 눈물과 체포와 감옥의 시간을 지나야 했지만, 나는 그 모든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어떻게 세우시는지를 보았다.

현재 김권능 목사는 인천한나라은혜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고 있다. 인천한나라은혜교회 공식 홈페이지는 교회 주소를 인천 남동구 논현로46번길 14로 안내하고 있으며, 교회 메뉴에는 북한선교와 구출 사역, “김목사와함께” 항목 등이 게시되어 있다. 또한 과천교회/Vimeo 게시 자료와 통일소망선교회 자료는 김권능 목사를 “인천한나라은혜교회 담임목사”로 표기하고 있고, 2025년 국민일보 보도도 김권능 목사를 한나라은혜교회 목사로 소개하고 있다.

육성 그대로

남긴 글 · 편지

청도한인교회 김무종 목사님께 드린 편지

청도 한인교회 김무종 목사님께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김목사님을 북한사역의 동역자로 세워주시고 목사님을 통하여 이번 북한 사역의 한단계 발전을 허락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글을 드립니다. 순교를 동반하는 북한 사역에서 이번에 선생님 세분과 형제님들 10분이 공안에 체포되었습니다. 이 엄혹한 시련속에서 김목사님의 열정적 지지와 동역으로 인하여 나머지 사역이 안정되게 되었습니다. 저는 1년간 최광선생님의 사역 장에서 학습을 마치고 사역을 확장시킨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제는 사역자로 서게 되었습니다. 아직은 믿음이 연약하고 부족한 것이 많지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해나가고 있습니다. 지금 북한의 수 많은 탈북자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간절히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나 위로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접하여 인생의 허무함을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북한 탈북자들이 준비하는 그 시간이 북한의 문이 열리는 시간으로 굳게 믿고 있습니다.

지금 북한의 탈북자들을 대상으로 많은 선교운동이 일어나지만 물질중심으로 그들의 영혼을 죽일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또 그들과 함께 사진찍고 자료를 뽑고 돈 몇십원을 주는 식으로 돈벌이를 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원한의 땅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강을 건느고 마음을 조이며 살아가는 그들이 돈벌이 하는 사람들의 기념사진 값이 될수 없고 그들의 생명으로 돈으로 될수 없습니다.

죽어가는 그들에게는 예수의 생명이 필요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김목사님이나 우리 최광선생같은 진실한 하나님의 일군들과의 동역을 희망합니다. 또 저의 사역장을 위하여 많은 기도 부탁드립니다. 김목사님께서 시간을 내 주셔서 사역장을 다녀갔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김목사님의 하시는 모든 사업과 청도한인교회가 항상 주님과 함께 하는 교회가 되며 북한과 세계 선교의 빛이되고 소금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1999,6,10 김권능(올림)

길림 감옥에서 보낸 첫 편지

선생님 안녕하세요? 길림 감옥에서 김권능이 편지를 보냅니다. 제가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이 길을 걷게 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올립니다. 지나온 사역의 전 과정을 돌이켜 보니 제가 특별히 선생님의 사랑과 신임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사역을 하면서 선생님은 열등감과 야심으로 뭉쳐져 있던 저에게 긍지와 책임감, 사명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허리 쭉 펴세요.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힘들 때에는 선생님이 했던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힘을 냅니다.처음 2년 동안 남의 빨래도 해 주고 밥그릇도 씻으면서 살았어요. 여기 감옥 안에서는 한 달에 천 원씩 쓰는 사람들은 편하게 다른 죄수들을 종처럼 부리면서 살아요. 한 달에 500원씩 쓰는 사람들은 천 원씩 쓰는 사람들의 옷도 빨고, 그릇도 씻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보다 돈이 더 없는 사람들은 감방 안을 청소하고 잠자리도 구석에서 쪼그리고 자면서 아무런 자유도 없이 살아야 합니다.

저도 얼마 전부터 선생님과 부모님들이 보내 주신 돈으로 한 달에 천 원씩 쓰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간수들이 상대접을 받으면서 살라고 하지만 거절하고, 그냥 사발 씻고 옷 빨면서 살고 있어요. 대접만 받고 군림하면서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저와 함께 사는 탈북자들에게도 계속 말해 주니 그들도 그렇게 살아 보려고 노력들을 하고 있습니다. 선생님 부탁입니다. 앞으로 돈으로 저를 돕지 말아 주십시오. 제가 선생님의 가정 형편을 모른다면 마음이 편하겠지만, 알기에 마음이 많이 아프네요. 권사님 입원했을 때도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내가 너무 비참해 보입니다. 선생님 앞에서 이런 말을 하다가 물론 욕을 먹을 줄은 알고 있지만 정말 내 심정 그대로입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권사님 건강과 사모님의 건강을 위해서 많이 신경 써 주시구요. 영니, 정니, 기현, 명현 이들의 공부에 사용해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선생님 꼭 부탁합니다.

정치 난민 청원서

정치 난민 청원서

김경일(김권능)은 2003년 3월 5일 중화인민공화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중급인민법원에서 중화인민공화국 경내에 비법 월경하여 있는 조선인 비법 월경자들을 조직하여 한국으로 보낸 죄, 곧 비법 월경 조직죄로 형사 판결을 받고, 2003년 중형 초자 제28호 판결서에 의하여 중화인민공화국 형법 제318조 제1판, 제25조, 제6조의 항목에 따라 무국적인 김경일: 유기징역 12년(2002년7월-2014년 7월)을 판결 받고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길림성 장춘 철북 감옥에서 복형하고 있습니다.저는 1999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의 극심한 식량난으로 인하여 살 길을 찾아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비법 월경한 후, 중화인민공화국 경내에서 진행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의 이유와 근거로 정치 난민 청원 조건이 충분하다고 생각하면서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와 사법부에 저의 정치 난민 문제를 해결하여 줄 것을 정중히 청원합니다. 현재 제가 받고 있는 죄인 비법 월경 조직죄는 중화인민공화국 경내에서는 형사 범죄에 속하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경내에서는 정치적 탄압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2001년 5월 중화인민공화국 요녕성 단동시에서 30여 명의 조선인 비법 월경자들을 조직하여 한국으로 보내려고 했던 북조선 함경북도 무산군 사람 김주복(26세)은 27명의 비법 월경자들과 함께 요녕성 단동시에서 체포되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넘어간 후 10개월간의 심문 끝에 2002년 4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함경북도 정치보위부에서 사건 주모자로 사형 언도를 받았으며, 그 중 6명은 15년, 17명은 10년까지의 판결을 받고 함경남도 요덕군 정치범 수용소를 비롯한 여러 정치범 수용소에 나뉘어져 있습니다. 당시에 함께 체포된 4명의 여인들이 풀려나온 중 2명의 여성이 2002년 5월 다시 중국으로 비법 월경하여 와서 그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저희들의 경우 북조선으로 넘겨질 경우 사형에 해당합니다. 이와 같은 사실들을 근거로 제가 북조선으로 추방이 되면 사형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저희의 생명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하여 중화인민공화국 사법부에 저희를 정치 난민으로 시급히 인정해 줄 것을 정중히 청원합니다. 저는 국제적 지위가 날로 높아가고 있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와 사법부에서 정부의 인도주의적 정책과 연합국 난민공약(유엔 난민기구)안에 있는 규정에 따라, 새 삶을 지향하는 한 인간의 생명과 안전을 신중히 고려하여 저희들의 정치 난민 문제를 조속히 해결하여 주실 것을 믿으면서, 형기 완료와 함께 한국을 비롯한 제3국(북조선이 아닌)으로 추방시켜 주실 것을 간절히 바랍니다.

감옥 생활과 사명에 대한 편지

안녕하세요 선생님? 이곳 생활은 군대 생활 같기도 하고, 수도원 생활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정말 감옥 같기도 하답니다. 이런 생활은 이미 선생님과 함께 학습하면서 훈련받아서 적응하기가 좀 쉬워졌어요. 이따금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으며 정주에서 학습하던 때가 생각납니다. 정말 즐거운 시절이었습니다. 감옥이 인간 생활의 가장 밑바닥이고 인간 지옥이라고는 하지만, 제가 이곳에서 느낀 것은 ‘사랑이 있는 곳에는 지옥이 없다’는 것입니다.

감옥은 저에게 많은 것들을 느끼게 합니다. 나도 그렇고 많은 이들이 작은 것 때문에 큰 것을 잊고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이곳에서 정말 많이 배우고 느낀 답니다. 이곳 생활은 나에게 인생에 대해서, 치욕과 영광에 대해서 알게 하구요, 사명을 더욱 굳게 하는 좋은 시간들입니다. 이곳의 많은 탈북자들도 이곳에 들어오길 잘했다고 한답니다. 하나님을 알고 사명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저도 처음 이 일을 하다가 체포되었을 때는 힘들었습니다. 더욱 많은 일은 못하고 잃은 것은 너무 많은 것 같았거든요.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잃은 것보다는 얻은 것이 더욱 많아요. 앞으로 얻은 것이 너무 많아 건사하기 바쁘게 되면 하나님이 저를 내보내 줄 것 같아요. 앞으로 5년이라는 시간을 이 안에서 열심히 살아갈 겁니다. 지금까지 어려운 중에도 항상 함께하신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언제나 함께 하시며 힘을 주실 줄 믿습니다. 이용섭 선생님 문제를 시급히 해결해야 할 것 같습니다. 몇 달 내에 북한으로 호송될 것 같습니다. 시간이 급한 것 같습니다. 기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이용섭 선생 북송 이후의 편지

선생님이 보내준 돈을 감사히 받았습니다. 그 돈을 이곳의 탈북자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들에게 선생님께 감사 편지를 쓰라고 했더니 쓰다가 간수들에게 들켰나 봐요. 간수가 나를 찾아와서 이러면 안 된다고 야단을 치더라고요. 이곳에서 나를 많이 경계하고 있어요. 그래서 나와 같은 감방에 있는 사람이 대표로 해서 감사 편지를 쓰게 했고, 그 편지를 함께 보냈어요. 여기 감옥에 저까지 6명의 탈북자들이 있어요. 선생님이 보내 주신 돈으로 맛있는 것 많이 사 먹었어요. 그래 봐야 돼지머리 고기 같은 거예요. 감옥에 들어와서부터는 머리를 박박 깎고 계속 씻어도 비듬이 왜 그렇게 많이 나오는지 모르겠네요. 그래서 샴푸도 사고 얼굴에 바르는 것도 좀 사고 몸도 가꾸고요, 거울을 들여다보니 주름이 많이 생겼네요. 돈은 너무 많이 자주 보내지 않아도 돼요. 지나치게 가난해도 힘들지만 지나치게 부유해도 안 되거든요. 필요한 만큼 이 생활에 유익이 될 만큼이면 된답니다. 부모님들로부터 목사님의 가정도 참 힘들게 살고 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아이들과 권사님이 우리 때문에 너무 힘들게 사는 것 같아 마음이 힘드네요. 그러니 돈은 더 이상 보내지 말아 주세요. 이곳 감옥은 자유는 없지만 북한에서 전문대 다닐 때 기숙사 생활보다 훨씬 좋답니다. 또 보위부 감옥이나 정치범들이 사는 곳에 비하면 호텔 생활이랍니다.

저는 이 선생님이 북송된 후 너무 뜻밖이어서 많이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마음의 평안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잘 지내고 있습니다. 힘든 곳에서 서로 힘을 주며 많은 의지가 됐었는데, 이 선생님은 떠나기 전까지도 자기가 나가면 나 혼자 이곳에서 어떻게 살겠는가고 많이 근심해 주었었습니다. 이용섭 선생이 형기가 다 되어 오면서 근심할 때, 저는 만일 하나님께서 이용섭 선생이 북으로 호송되게 하셔서 순교하시게 한다면 나도 그렇게 되도록 해 주시길 원한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그 말을 한 후에 저 스스로 내가 너무 지나치게 말하지 않았나 좀 근심도 했었고요. 그러나 믿음에는 잘못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이렇게 편지를 합니다.

제가 유엔이나 한국 정부에 제출했던 난민 신청을 취소하겠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의 뜻에 의지하지 않았던 제가 부끄럽습니다. 지금까지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당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 조금만이라도 가치 있게 하나님께 가게 해 달라고 기도했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기회를 주셨고요. 그러니 이제는 만족하겠습니다. 하나님 앞에 깨끗하게 큰일을 하고 가려면 천 년이 걸려도 다할 수 없을 것 같네요. 더군다나 얼마 전 꿈속에서 “이만하면 됐다.”라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그날까지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노력하려고 합니다.

어차피 선생님께서 저희들을 가르치실 때 “북한을 위하여 순교하자!”는 것이 저희들의 가장 큰 목표로 삼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저의 이름도 김권능이라고, 최김권능 목사님의 이름을 따와서 지어 주셨고요. 1기 사역으로부터 7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속에서 이제야 좀 깨닫는 것 같습니다.

1기 사역을 마친 후 어느 날인가 제가 선생님께 “사역 전의 저와 사역 후의 저를 비교해 보니까 마치 성인이 돼서 유치원 때의 저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을 겁니다. 또 지금이 그렇습니다. 선생님, 저는 저의 모든 생각과 각오를 선생님께서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실 줄 믿습니다.

모든 것, 성경에서 말씀하신 얽매이기 쉬운 모든 것을 끊어 버리니 마음이 평안해서 좋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탈북자들을 돕지 않으시면 나 스스로의 노력으로라도 일하겠다고, 앞으로는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갚겠다고 몸부림도 쳐 봤었는데, 모든 것을 포기하니 마음이 평안하고 그러다가도 탈북자들이 당하는 고통을 생각하면 또 괴롭고 이것이 제 마음 상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지 않으시면 누구도 할 수 없음을 믿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6개월간 이용섭 선생님의 소식을 기다려 본 후에 그때까지 소식이 없으면 이 선생님이 순교하신 줄 알겠다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감형 회의가 끝나면 이곳에서 탈북자 몇 명이 또 북으로 호송됩니다. 그들에게 이 선생님에 대하여 잘 알아보고 빨리 들어와 연락해 달라고 부탁해 놓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