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권능 선생의 상황은 위험했다. 중국은 자국 내에서 범죄 활동을 하다가 판결을 받고 형을 마친 탈북자들을 북송하면서, 형을 받은 이유와 판결서까지 북한 정부에 넘겨준다고 했다. 그렇게 되면 수많은 탈북자들을 남한으로 보냈고, 본인도 남한으로 가다가 체포된 김권능 선생을 북한 정부가 그냥 두지 않을 것이었다.
김권능 선생은 두려워했다. 나는 한국에서 정치적으로 영향력 있는 분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의 상황을 국제사회와 유엔에 알려서 어떤 형태의 도움이든 받아, 북한으로 북송되는 것을 막고 싶었다. 이때부터 김권능 선생과 편지로 서로 안부를 주고받았다.
나는 김권능 선생의 정치 난민 신청서를 가지고 갈 수 있는 곳은 다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김권능 선생을 살려 주십시오. 이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체포된 사람들입니다. 김권능 선생은 북한으로 북송이 되면 사형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북한선교 담당자를 통하여 유엔 사무실에도, 미국 대사관과 한국 외교부에도 청원서를 내고 도움을 요청했다. 몇 년을 열심히 뛰어다녔지만 뚜렷한 성과는 없었다.
나는 김권능 선생이 있는 감옥으로 가서 그를 만나보고 싶었다. 그의 부모님들과 주변 사람들은 모두 반대했다. 그래도 나는 그를 만나고 싶었다. 나는 기도하기 시작했다. 중국 지린성 창춘시에 있는 24시 기도의 집 팀장인 소망 선생님과 식구들에게 김권능 선생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다. 한 달 후 소망 선생님과 기도 식구들과 함께 창춘 철베이 감옥을 한 바퀴 돌면서 기도했다. 살을 찢는 눈보라 속에서 10리가 넘는 철베이 감옥 둘레를 돌며 울면서 기도했다.
그 후 김권능 선생의 부모님과 남동생, 여동생이 면회하러 갈 때 나도 따라가기로 했다. 입구에서 문을 지키는 공안이 김권능 선생 가족들의 여권까지 조사하면서도 나에게는 여권을 보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가족들과 섞여 면회장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김권능 선생을 만났다. 내가 면회 올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그는 나를 보고 충격을 받았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면회장의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아무 말 없이 울기 시작했다. 하고 싶은 말은 산처럼 많았지만 정작 만나니 할 말이 없었다.
한참 후 김권능 선생이 “선생님……” 하고 말했다. 나는 “그래……”라고 대답했다. 마이크에서 갑자기 공안의 안내 멘트가 흘러나왔다. “마이크가 고장 난 것 같으니 다른 쪽 마이크를 사용하세요.” 도청하고 있던 공안이 둘 사이에 아무 말소리도 들리지 않자 마이크가 고장 난 것으로 판단한 모양이었다.
공안을 의식한 김권능 선생이 먼저 말했다. “많이 늙었습니다. 선생님.” 나는 말했다. “너는 건강하니? 기도 많이 해라. 우리도 기도 많이 하고 있다. 최선을 다해 보자. 건강하게 나와서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해야지.”
뒤쪽에서 한 공안이 나를 불렀다. 끌려 들어간 방은 도청실이었다. 공안은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는 고함을 질렀다. “너 말이야, 어디 가서 절대로 면회했다는 말을 하지 마! 누구한테도 면회했다는 소리를 하게 되면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이어 그는 김권능 선생의 아버님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 “왜 목사를 데리고 왔어? 여기가 어딘지 알기나 알아? 내가 어디까지 당신들을 봐 줘야 해?”
살았다. 온몸이 쪼그라들 것 같은 공포 속에서 도망치듯 나왔다. 그러나 감옥을 빠져나왔지만 서러웠다. 북한 사람이라는 이유 때문에, 단 하나 그 이유 때문에 다른 나라 사람 같으면 죄도 아닌 죄를 가지고 12년씩 감옥을 살아야 했다. 어린 김권능 선생은 감옥 안에서 젊은 청춘을 다 잃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