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역 참여 배경
최원길 선생은 1999년 김권능 선생이 제2기 학생 모집을 위해 연변 지역에 파송되었을 때 합류한 조선족 형제이다.
당시 북한 출신 형제들과 함께 생활하며 사역을 감당할 조선족 동역자를 찾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신분 노출 위험과 법적 처벌 가능성 때문에 대부분의 조선족들은 사역 참여를 꺼렸다.
그러던 중 조선족 전관화 선생의 소개로 최원길 형제가 사역에 합류하게 되었다.
2기 · 중국 1차 사역
제2기
2기 · 사역 기록
최원길 선생은 1999년 김권능 선생이 제2기 학생 모집을 위해 연변 지역에 파송되었을 때 합류한 조선족 형제이다.
당시 북한 출신 형제들과 함께 생활하며 사역을 감당할 조선족 동역자를 찾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신분 노출 위험과 법적 처벌 가능성 때문에 대부분의 조선족들은 사역 참여를 꺼렸다.
그러던 중 조선족 전관화 선생의 소개로 최원길 형제가 사역에 합류하게 되었다.
최원길 선생은 연길 해양대학을 갓 졸업한 청년이었다.
김권능 선생의 사역을 돕기 위해 자원하여 훈련장에 들어왔으며, 이후 한국 순교자의 이름을 따라 ‘최원초’라는 사역명을 받았다.
사역장 운영에 필요한 행정, 통역, 계약, 생활 지원 등 눈에 띄지 않는 수많은 일들을 감당하며 북한 형제들을 섬겼다.
최원초 선생은 내성적이고 말수가 적은 성격이었다.
다른 형제들이 휴식 시간에 밖으로 나가 활동할 때에도 대부분의 시간을 방에서 보내며 말씀을 묵상하였다.
평소에는 조용했지만 이야기를 시작하면 손짓과 몸짓을 곁들여 열정적으로 이야기하는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
성경 통독과 암송, 기도 훈련을 매우 성실하게 수행하였다.
박다윗 선생의 영적 문제로 사역장이 어려움을 겪을 때도 묵묵히 곁에서 돕고 섬겼다.
장만식 선생 체포 사건과 북송 사건 등 위기 상황에서도 끝까지 함께하며 사역을 지원하였다.
위험한 일들을 회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참여한 충성된 동역자였다.
어느 날 익두 선생과 권능 선생이 공안에 체포되는 위기를 맞았다.
공안은 권능 선생의 신분증을 가져오라고 요구했고, 최원초 선생은 자신의 신분증을 선뜻 내주었다.
놀랍게도 신분증 사진이 권능 선생과 매우 비슷하여 공안을 속일 수 있었고, 결국 권능 선생은 무사히 풀려날 수 있었다.
최원초 선생의 희생과 용기가 사역자를 구한 사건이었다.
북한 형제들이 선생으로 임명받던 날, 최원초 선생은 시편 126편을 본문으로 설교하였다.
평소 조용하던 모습과 달리 매우 깊이 있고 은혜로운 설교를 전해 많은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최광 선교사는 당시부터 최원초 선생이 장차 훌륭한 사역자가 될 것이라 확신하였다.
훈련 후 귀향한 최원초 선생은 연변 개산툰 교회에서 설교하였다.
성도들과 아버지는 그의 변화된 모습과 성경 실력에 큰 충격을 받았다.
결국 아버지는 직접 훈련장을 찾아와 자신도 통독훈련에 참여하고, 아내는 통역을 돕고, 아들은 계속 사역하도록 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후 최원초 선생 가족은 열방빛선교회의 중요한 협력 가정이 되었다.
최원초 선생의 아버지는 약 3개월 동안 직접 통독훈련을 받았다.
그러나 훈련의 강도와 북한 형제들을 선교사로 양성하는 과정을 보며 크게 놀랐다.
그는 “이런 사람들을 변화시켜 선교사로 만든다는 것은 숟가락으로 산을 파는 일과 같다.”고 말할 정도로 훈련의 어려움을 실감하였다.
훗날 최원초 선생은 연변 지역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를 도우며 사역하였다.
현지 선교사들은 그를 “성경을 매우 잘 알고 준비된 일꾼”이라고 평가하였다.
훈련의 열매가 실제 사역 현장에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최원초 선생은 이후 한국으로 입국하였다.
고신대학교에 진학하였고, 신학대학원까지 졸업하였다.
서울 시흥동 열방빛교회 시절에도 방문하여 설교와 교제를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