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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이야기

2기 · 중국 1차 사역

안학철

중국 1차 사역 / 허익두 선생 사역장 (1999~2000년)

소속 / 사역기수
중국 1차 사역 / 허익두 선생 사역장 (1999~2000년)
출신
중국 조선족
주요 역할
사역장 조선족 동역자, 북한 형제들 생활 지원, 중국어 교사, 성경 통독 100독 완성 및 세례
최종 기록
익두 선생 사역을 처음부터 끝까지 동행. 세례 및 선교사 훈련 이수

2기 · 사역 기록

사역의 발자취

신분증 하나로 위기를 넘긴 조선족 동역자,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한 사람

사역장과 조선족 동역자의 역할

통독 사역장마다 조선족 형제 한 명은 꼭 있어야만 했다. 사역장으로 쓸 집을 계약하고 중국인들과 관계하는 일부터, 북한 형제들이 아프면 병원으로 데려가는 일까지, 조선족 형제가 해야 할 일은 많았다. 대부분의 조선족 형제들은 북한 형제들이 공안에 체포되면 자기 신분증을 내주어 빼내기도 했다. 사역장들이 오랫동안 안전하게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보이지 않게 헌신한 수많은 조선족 형제들의 도움이 컸다.

그러나 중국 조선족들은 북한 탈북자들처럼 숨어서 도망 다녀야 할 이유도 없고, 살인적인 강도의 훈련을 받으며 성경을 배워야 할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 이 때문에 팀장들은 조선족 형제를 구하는 일을 가장 힘들어했다. 오려는 분들도 훈련 강도가 너무 높아 얼마 지내지 못하고 돌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신앙 없이 사역장에 들어온 스물두 살

허익두 선생은 자기 팀의 조선족 동역자로 안학철 형제를 데리고 왔다. 당시 학철 형제는 스물두 살의 어린 청년이었다. 너무 어린 청년이 이 고단한 봉사의 길을 선택했기에 대단한 신앙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함께 공부해 보니 신앙이 전혀 없었다.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도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

그럼에도 사역장의 모든 훈련에 성실하게 임했다. 오히려 탈북자들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고 성실하게 성경을 읽었다. 문화와 생활 방식이 전혀 다른 탈북자들을 힘들어하는 조선족 형제들이 많았지만, 학철 형제는 별 이질감 없이 잘 어울렸다. 누군가 말해 주지 않으면 그가 조선족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함께 살던 북한 형제들이 자꾸만 궁금해서 물었다.

“우리는 갈 데가 없어서 이런 힘든 훈련을 버텨 내고 있는데 도대체 너는 왜 이런 힘든 훈련을 받고 있니? 앞으로 전도사가 될 거니? 엄마 아빠 뭐 해?”

학철 형제는 침묵했다. 아무런 말도 해 주지 않았다.

신분증 하나로 위기를 넘기다

어느 날 익두 선생 팀이 하남성 정주에서 공부할 때였다. 최바울 선생 팀이 중국 공안에 전원 체포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권능 선생과 익두 선생도 바울 선생 사역장에 양식을 구하러 갔다가 함께 체포되었다. 두 선생은 자신들은 놀러 온 친구들이라고, 집에 가면 신분증이 있다고 하자 공안들이 신분증을 가져오라며 내보내 주었다.

그런데 신분증이 없었다. 그냥 돌아가지 않으면 파출소에 잡힌 바울 선생 팀이 위험해지는 상황이었다. 익두 선생이 난감해하자 학철 형제가 자기 신분증을 꺼내 주었다.

“이거라도 가지고 가 보시오.”

학철 형제와 익두 선생은 외모가 판이하게 달랐다. 통할 리 없었다. 학철 형제가 다시 말했다.

“그래도 가져가 보시오. 맨날 하나님 믿는 거 배웠는데 이럴 때 한번 써 봅시다.”

결국 익두 선생이 학철 형제의 신분증을 들고, 권능 선생도 사역장의 조선족 원초 형제 신분증을 들고 주님을 부르짖으며 공안국에 들어갔다. 일이 잘못되면 두 선생도 함께 체포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공안들의 눈에 뭔가 씌었는지, 두 선생의 얼굴과 신분증을 보고도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했다. 그렇게 두 선생은 무사히 파출소에서 나올 수 있었다. 다만 공안들이 신분증은 회수해 갔다.

학철 형제는 신분증이 없어져 버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일없습니다. 또 만들면 됩니다. 그 까짓 거 뭐...”

추운 잔디밭에서 함께 누운 밤

바울 선생 팀 가운데 익두 선생 사역장의 위치를 아는 사람이 있었다. 신분이 노출되면 공안들이 사역장을 찾아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 북한 형제들은 사역장을 뛰쳐나가 며칠 동안 정주 교통대학교 잔디밭에서 지냈다. 초겨울에 이불도 없이 여름옷을 입고 밖에서 자는 것은 정말 고통스러웠다.

학철 형제도 북한 형제들과 함께 잔디밭에서 잤다. 조선족인 학철 형제는 공안에 잡혀갈 이유가 없었다. 집에 들어가 따뜻하게 자도 아무 문제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북한 형제들과 함께했다. 추위에 떨며 신음하는 학철 형제에게 북한 형제들이 이번에는 반대로 물었다.

“학철 형제는 아버지 어머니가 없습니까?”

“집이 없습니까? 우리처럼 갈 데가 없는 사람입니까?”

학철 형제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익두 선생에게 물어봐도 무슨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아무 말도 해 주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말없이 동행하다

안학철 형제는 익두 선생 사역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함께했다. 사역장에서 말없이 북한 형제들을 성심성의껏 도왔다. 짬 시간마다 북한 형제들에게 중국어를 가르쳐 주었다. 학철 형제 덕분에 김성근 형제와 현수 형제, 칼빈 형제는 생활 중국어를 배울 수 있었다.

학철 형제는 북한 형제들과 함께 성경 통독 100독 이상을 했고 암송도 수백 절을 했다. 성경을 배우면서 하나님을 깊이 만났다. 김의환 총장님이 오셨을 때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다. 설교하는 훈련과 각종 선교사 훈련도 모두 이수했다.

역사적 평가

안학철 선생은 중국 사역 역사에서 가장 조용하고 가장 헌신적인 동역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신앙도 없이 사역장에 들어와 탈북자들보다 더 성실하게 훈련을 받았고, 자기 신분증을 내어 주어 위기를 넘겼으며, 잡혀갈 이유가 없음에도 추운 잔디밭에서 북한 형제들과 함께 누웠다.

그는 왜 그랬는지 끝내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동행 자체가 이미 하나의 답이었다. 조선족 동역자들의 보이지 않는 헌신 없이는 중국 사역의 어떤 열매도 맺어질 수 없었다. 안학철 선생은 그 헌신을 가장 온전하게 살아낸 사람이다.